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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오데이 2019년 11월호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불꽃 튀는 용광로와 무한한 진리의 바다
서평. 교부와 만나다: 초대교회 스승들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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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지원 테오필로 기자 소속
작성일 2019.11.04 10:00 조회 73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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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출판사에서 출간된 “교부와 만나다”를 동료 사제들과 모여 읽은 바를 나누었다. 그 모임 후에 교회에 돌아와 예비자 세례 교육을 시작했다. 교육 처음에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성공회 교회가 가톨릭인가, 개신교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교회의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동방교회 서방교회에서 멈춰섰다. 예비자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내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책 나눔을 하고서 예비자 교육 첫 시간에 동방과 서방교회의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책의 1장에는 신약성서가 정경으로 구성되기 전에 나온 교리서 형식의 책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디다케’를 소개하고 있으니 예비자 교육과 연결된다. 세례를 통해 교회에 입문을 하게 되는 신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는 성찬례에서 친교의 체험을 하는데 이러한 내용을 ‘디다케’가 전하고 있다. 어쩌면 “교부와 만나다”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거창하게 소개하기보다 지금도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닿아 있다.

최초의 교부들은 근사한 책을 쓰고 당시의 사상들에 멋지게 반박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작품을 목적으로 쓰지 않았다. “교부를 만나다”는 첫 부분에 단순한 교육과 성찬례를 소개하고, 바로 이어 교부들이 교회를 키우고, 용기를 주었으며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한 편지글을 배치하고 있다. 정경으로 인정된 최초의 신약성서가 바울로 서간인 점을 보더라도 교부들의 편지가 얼마나 가치 있고 교회에 중요한 것인가!

저자인 아달베르 함만은 프란치스코 수도사제로 교부연구에 몰두해 온 학자이다. “교부를 읽기” 라는 원래 불어제목(Pour lire les Pères de L’Église)에서 보듯이 교부학과 교부신학의 입문서이지만, 선이해가 부족하다면 일반 교우들이 읽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난이도가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초기부터 후대에 이르는 교부들의 삶과 이야기를 조금의 인내를 가지고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흐름을 잡을 수 있다. 게다가 시작부분과 곳곳에 신학용어와 중요한 사건, 연대표 등등을 정리해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하게 구성되어 있다. 단순하게 교부들과 시대의 흐름을 서술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교부들의 시와 찬가, 설교, 기도 그리고 신학적 저술들의 번역문과 예문들을 실어서 교부들의 목소리에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 

이 책의 목차를 본다면 우선 선교의 시작과 방향에서 신앙이 문화적으로 뿌리 내리는 과정, 무엇보다도 순교라는 무엇과도 대치할 수 없는 특별한 신앙증언의 사건들, 온갖 어려움을 겪어내고 지상으로 올라온 교회를 지탱한 교부들의 노력과 비잔티움과 중세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흐름으로 엮어져 있다. 

유스티노의 순교를 전하는 글을 접하고 있노라면 순교가 은총이고 사랑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총독은 고집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하지 않는다면 너는 무자비하게 고문당할 것이다.” 유스티누스는 대답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문당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 그것이 우리 소원입니다. 이 고통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어 주고 우리가 구세주이신 주님이 준엄하고 공정한 심판대 앞에 나아갈 때 자신감을 줄 것입니다.”(160쪽)

교부들의 신앙의 유산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면면히 교회의 전통과 생명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종교개혁에서부터 지난 세기의 세계 공의회에서 모토로 삼고 있는 ‘원천으로 돌아감’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처음의 제도로 회귀를 말하지 않고 생생하고 뜨거웠던 진리를 위한 투신과 희생을 본받아 오늘에 되살리는데 있다. 옥스퍼드 운동을 벌였던 사제들이 주목한 바 또한 교부들에 관한 연구였고, 그 이유는 동방과 서방교회가 갈라지기 이전의 최초의 신앙고백을 하였던 교회를 알고 참교회의 모습과 교회가 어떤 권력가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닌 원천, 즉 그리스도에게서 연유함을 보고자 하였다. 추측컨대 이 운동은 프랑스의 신신학운동(Nouvelle Théologie)이 교부연구를 촉발하는데 연결될 수도 있으며 독일의 하르낙의 초기 교회의 교부연구보다도 앞선다. 

아달베르 함만은 “교부와 만나다”에서 모든 교부들의 세세하고 정확한 신학적 의미를 소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그가 기본적인 신학적 개념과 역사적 흐름을 간과하지는 않지만 교부들의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한 사목의 정신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 교부들은 전문적인 학자의 면모보다는 참다운 사목자였다. 그들이 쓴 편지와 설교가 그것을 증명한다. 둘째, 교부들은 원하지 않게 학자의 길이 아니라 공동체의 부름을 받아 주교로서 직무를 수행했던 이들이 많았다. 필요한 사항이 있을 때에 저술을 하였고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 셋째, 교부들은 그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삶에 집중하였던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이 책 곳곳에 그들의 사목적 열정을 담은 글들을 읽어가노라면 어느덧 우리 마음은 위로를 얻는다.

교부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동서방 교회가 갈라지지 않았던 원초적 하나의 교회였음을 보게한다. 비록 저자가 말하듯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신학적 노선도 점차 멀어졌지만 원래 하나였던 교회는 신학과 전통이 늘 교차하고 맞물려 있었다. 초기 교회의 최고봉이라 일컫는 오리게네스의 저작들은 아리우스파와의 오해로 불태워버리게 되었으나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연결되고 있다. 법적인 측면이 강했던 서방신학의 풍토와 동방신학이 가진 우주적이고 사변적이며 직관적 풍토들이 정치적이고 시대적 한계로 인해 갈라지게 됨을 안타까워한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웠던 사목자였고 동서방이 분열되기 이전의 신앙의 증인들이며 죽음도 그들을 누르지 못했던 열정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모름지기 교부들을 탐구하고 삶을 본받고저 할 때 교회는 원천으로 돌아가 쇄신과 개혁의 톱니바퀴를 돌리게 된다. 교부들은 진리의 바다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렸고 그 바다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때로는 불꽃이 튀는 격렬한 논쟁도 서슴지 않았으니 진리에 서 있었기에 가능하다. 모든 사사로운 것들과 오류는 용광로에서 스러지고 확고한 진리가 단련되어 선포되었으니 진리의 바다와 불꽃 튀는 용광로라는 교부들의 진면목을 만나게 된다.

교부들의 고민과 사목적 선택과 진리에의 투신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살아 움직이는 교부들의 가르침을 오늘날 되살리는 일이 지금 교회에 필요하다. 그 가르침에 교회의 일치의 길이 있고 신학과 영적 체험을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신학적 사색과 성사적 삶,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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