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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선교: 지구촌 선교 5대 지표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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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 잭 니링기예 / 황윤하 라파엘 번역 기자 소속 성공회 강남교회
작성일 2020.03.25 10:21 조회 68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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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TV를 보다가 우연히 많은 청중 앞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설교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여러 민족, 청년과 노년, 여성과 남성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된 청중 앞에서 설교자는 영어로 설교했고, 그의 설교는 루간다어(중앙 우간다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로 통역되었다. 청중 다수는 영어를 직접 알아듣기보다는 통역을 통해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일 텐데도 그들이 설교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박수를 치며 일어서서 환호하며 웃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프로그램에 집중하며, 그 설교의 어떤 부분이 청중을 사로잡는지 알고자 했다. 설교자는 신체적 건강, 생계를 위한 노동, 적절한 쉼의 공간과 매일의 양식 등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직장에서나 독신, 결혼, 가족이라는 모습 속에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운다고 설교했다. 그것은 옳은 이야기였다. 설교가 끝나갈 무렵,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받을 준비가 된’ 청중들의 반응을 요청했다. 많은 청중들이 그에게 나아갔다.

텔레비전 설교자와 그의 설교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가 매우 영향력 있는 설교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설교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확고한, 극적인 스타일이 있었고, 유머로 넘쳤다. 그는 듣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듣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했다. 듣는 이들의 필요와 그들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설교는 듣는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나는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인가’ 하는 질문에 빠져들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기쁨과는 관계없이 단순히 듣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을까? 더 나아가 설교자의 이야기가 정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것인지 생각해보면, 단순히 선포하고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음에 대한 신학적이고 선교학적인 성찰은 이 글이 다루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성공회 선교 5대 지표 중 첫 번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라는 지표는 선포의 주제와 방법 모두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 성찰은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신학과 실천을, 핵심과 형태를, 말씀을 믿는 것과 행함을 나누는 잘못된 이분법에 빠지지 말아야한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본질이 선포의 의미와 목적을 만든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며 그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한 방법을 통해 선포의 의미와 목적을 배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서, 또 그들을 통해 계속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나라에’(루가 24:47) 회개와 용서를 선포하신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과 그의 첫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이 시대에 복음을 선포하는 모델로 삼아야 할 기준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실천적 선포에 적용해야 하는 기준이다.

예수의 선포

마태오, 마르코, 루가 그리고 요한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사역 이야기는 그가 행하신 모든 열정적 선교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으며,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하느님 나라에 속한 존재이자 그 메시지 자체로 인식했음을 말한다. 마태오는 예수님이 가파르나움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하셨음을 전한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는 구절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전한다. 유다인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가르치고 설교를 할 수 있게 된 서른 살, 예수님의 메시지는 단 한 가지, 하느님 나라였다. 마태오는 ‘그가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마태 4:23)고 말한다.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고자 하는 도전은 2천 년 전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성서적 관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왕국들의 개념으로 인해 오해되기 쉽다. 현대 사회에서 ‘왕국’이라는 말은 낡고 억압적이며 때때로 잔혹한 힘을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내가 예수님의 사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냈던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왕국이라는 단어가 자기 안에서 불러일으킨 억압과 지배의 이미지와 싸우고 있었다. 우간다에서 ‘왕국’이라는 말은 지금의 중앙 우간다 지역에 있었고 여전히 그 잔재가 남아 있는 고대 부간다 왕국의 중앙집권적이고 계층적이며 지배적인 통치 구조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19세기 말 우간다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기 전, 부간다의 지배권은 최고조에 달했고, 지금의 우간다 지역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던 왕국이었다. 그 권력의 꼭대기, 왕국 권력의 중심점에 가장 힘있는 존재이며, 사회, 정치, 경제, 종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부간다의 왕 카바카가 있었다. 부간다의 모든 땅은 그의 것이었고, 땅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모든 것이 그의 소유였다. 그 왕국에서 카바카보다 위대한 것은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칭호를 가졌다. 그는 모든 것을 관장하고, 전체주의적인 힘을 가졌다.

이러한 왕국 모델의 문제점은 단지 왕에게 절대 권력이 부여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이 유한하고 죄성이 가득한 인간이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지배하고 심지어 노예로 삼기 위해 남용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왕국이라는 말은 지배와 권력의 남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셨던 시기의 팔레스타인 문화 역시 이와 같은 왕국 모델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 로마인들의 왕국이 그들을 수년 동안 다스리고 있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의 사자’가 로마인들의 왕국을 뒤엎고 예루살렘을 새롭게 세울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 모델이 야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왕국 자체가 가지는 본질적 의미보다 왕국이 통치하는 영역, 영토에 더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왕국에 대한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염두하고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했다.

복음서에서 사용된 ‘왕국’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바실레이아basileia’이다. 예수님은 이 단어에 ‘왕국’, ‘주권’, ‘통치’, ‘왕권’과 같은 의미를 담아 사용했다. 영역이나 공동체적 의미는 많지 않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와 역동성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정의와 관련된 것이다. 루가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루가 복음서는 토요일 아침, 갈릴래아 나자렛의 마을에 있는 동네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전한다.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4:17-21, 공동번역성서)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로마 제국이나 부간다 왕국과는 달랐다.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며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이야기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통치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가시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가 캔자스 오버랜드 파크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교회의 담당 사목자 부부와 함께 지역 쇼핑몰에 갔다가 패스트푸드 음식점에 점심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우리가 주문한 것과 함께 받은 냅킨에 적혀 있었던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라는 그 식당의 슬로건이었다. 나는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위한 모든 것’이었다! 교부 중 한 사람인 오리게네스가 말했던 것처럼, 예수는 autobasileia, 즉 자기 자신이 곧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가시화되고 다시 세워진다. 그는 자기 나라(요한 1:11), 자신의 세상에 그의 목적과 통치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 그를 통해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와 다스림이 이 땅에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진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서는 정말 어떤 방법으로도 하느님 나라를 알 수 없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의 그의 삶과 사역이 하느님의 역동적인 통치를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지, 그리고 그 다스림에 대한 응답이 만드는 세상과 사회의 본질을 정의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그들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요한 10:10), 혹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영원한 생명, 즉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은 하느님과 하느님을 실제로 드러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참회는 하느님 나라를 살기로 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표징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치료와 귀신을 쫓아낸 일,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신 일들은 표징이었고, 예수님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져온 존재로 인식하도록 하는 기적이었다. 이러한 사역들은 또한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찾아와 그가 정말 메시아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치유의 기적과 가난한 자에게 선포된 복음에 대해 곱씹어보라고 대답헀다. 특별히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일은 하느님 나라에 대항하는 악한 힘을 공격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악마들의 왕자인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혀 이용당하고 있다는 혐의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에 의해 고발당했을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방법은 악의 권세를 꺾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가정도 버티어 나갈 수 없다. 만일 사탄의 나라가 내분으로 갈라진다면 그 나라는 지탱하지 못하고 망하게 될 것이다. 또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털어가려면 그는 먼저 그 힘센 사람을 묶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그 집을 털 수 있을 것이다.” (마르 3:23-27, 공동번역성서)

귀신을 쫓아낸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악한 권세에 대한 실질적 승리는 강한 자, 즉 사탄을 꽁꽁 묶어 그를 완전히 무력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자신의 죽음을 악으로부터 승리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 16:16)라 고백한 이후 있었던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마태 16:22)라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어떤 대가를 주고서라도 반드시 피했어야 할 저주가 아니었다. 베드로는 십자가가 하느님이 메시아를 통해 이끌어가기로 약속된 하느님 나라로 가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그리스도]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마르 8:31)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라고 엄하게 꾸짖으셨다. 하느님 나라를 대적하는 존재인 사탄은 베드로를 이용했다. 예수님은 사탄을 묶는 일을 끝내셔야만 했다. 십자가가 바로 그 결전의 장소였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은 강한 자, 즉 악마와 그의 모든 권세를 묶어버렸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을 이루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우회도로나 장애물이 아니었고,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 그 자체도 아니었다. 그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을 대항하는 모든 권세가 꺾이고, 하느님 나라가 완전히 성취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부활은 십자가가 악한 세력의 권세를 완전히 이겼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구속사역이 성취되었음에 대한 확인이다. 부활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40일을 함께하셨을 때, 그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계속 이어갔다는 사실(사도 1:3)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사도 1:8) 모든 나라에 회개와 용서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과 함께하는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의 승천과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심은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제자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되었다. 

진정한 복음의 선포는 자신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실체화시킨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그 자체였다. 이 사실이 1979년 루가 복음서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제작된 예수님의 삶을 담은 두 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예수Jesus Film〉의 놀라운 영향력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 다큐멘터리가 가진 힘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것에 있다. 공식 웹사이트 www.jesusfilm.org에 따르면 이 다큐멘터리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영되었으며, 지금까지 수백 가지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많은 개인과 공동체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회심한 이들의 수에 대해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자칫 이 작품의 목적이 사람들을 회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기게 만들 수 있지만.

진정한 복음의 선포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제자들이 행했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오늘날에도 계속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그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영화 〈예수〉는 루가 복음서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멈췄기에, 지난 20세기 동안 하느님 나라를 세워가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성령을 통해 실체화된 사례를 보여주지 않아 불완전한 느낌이 있다. 복음서의 저자인 성 루가는 사도행전을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을 데오필로님께 드린다. 나는 먼젓번 책에서 예수의 모든 행적과 가르치심을 다 기록하였다. 곧 예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의 힘으로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신 다음 승천하신 그날까지의 일을 시초에서부터 낱낱이 기록하였다.”(사도 1:1-2) 루가는 자신이 지금 막 시작하려는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가 루가 복음서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 즉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을 담은 이야기의 연속이라 말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이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나는 전 세계에 알파코스(런던 중심부에 있는 성공회 교회인 홀리 트리니티 교회, 브롬프턴이 만든 복음주의 프로그램)가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 이유 중 한 가지는 이 프로그램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 모두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프로그램은 나자렛의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역사하시는 성령을 보여준다. 10주간 진행되는 알파코스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 세션 1: 예수는 누구인가?
  • 세션 2: 예수는 왜 죽었는가?
  • 세션 3: 어떻게 신앙을 확신할 수 있는가?
  • 세션 4: 왜,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 세션 5: 왜, 그리고 어떻게 성서를 읽어야 할까?
  • 세션 6: 하느님은 우리를 어떻게 이끄시는가?
  • 세션 7: 어떻게 악에 저항할 수 있는가?
  • 세션 8: 하느님은 오늘날에도 치유하시는가?
  • 세션 9: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가?
  • 세션 10: 교회란 무엇인가?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복음 선포의 방법과 의미는 복음서에 기록되고 성령을 통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예수의 삶과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은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것이다. 내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모든 교회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자신들의 삶과 구조와 조직 안에서 살아내지 못한 많은 교회들이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과 의미들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사도들의 시대의 이야기인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다. 사도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그들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성령에 순종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베드로와 새롭게 생겨난 예수의 제자 공동체 - 사도행전 2장

이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시작한다. 루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 말씀하셨던 것에 순종하여(사도 1:4) 그곳에서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120여 명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들 중에는 11명의 사도들과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하여 뽑힌 마티아가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사도 1:14)과 함께 있었다. 모인 이들은 성령으로 충만했다.

예루살렘은 당시 모든 활동의 중심지였다. 유다인의 명절인 오순절을 기념하기 위해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아의 여러 지방 사람, 로마에서 나그네로 온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 그레데 사람, 아라비아 사람(사도 2:9-11)등 많은 이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그들은 120명의 갈릴래아 사람들로부터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어리둥절하고 당황했다. 베드로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는 신전 입구에 올라서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과 하느님께서 ‘주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사도 2:36)’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베드로는 어떻게 유다의 역사가 나자렛 예수를 통해 그 의미를 발견하고 성취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놀라운 사실은 베드로가 청중들에게 응답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청중들은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사도 2:37)하고 물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를 불러일으켰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회개라고 대답했다. 루가는 ‘그날에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은 3천 명이나 되었다’(사도 2:41)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흥회, 혹은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집회가 유행하게 된 것은 1950년대 시작된 빌리 그레이엄의 ‘복음주의 십자군’ 이후이다. 이러한 집회는 베드로의 청중들처럼, 청중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명목상의 얕은 지식 정도를 가지고 있을때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이름만 남게 된 상황에서, 부흥회와 같은 모임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고, 회개하도록 이끄는 기회가 될 수 있다. 1920년 우간다 성공회에서 시작되어 1930~40년대 르완다와 다른 동부 아프리카의 나라들까지 확대된 동아프리카 부흥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우간다의 동아프리카 부흥운동은 교회가 성장하며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부흥운동에 감화를 받은 이들이 설교팀을 구성하여 서쪽 및 중앙 우간다 전역을 돌며 부흥회를 열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덕적 해이함을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으로 모여들었다. 죄에 대한 공적 회개는 예루살렘에 모인 이들이 베드로에게 했던,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와 같았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났던 일이 우간다에서도 일어났다.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교회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한 과제는, 부흥회와 같은 모임이 단순히 기적을 보여주는 축제와 번영신학에 의해 변질되어 회개를 이끌어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루살렘 부흥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를 그 모임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어떻게 일상에서 회심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아는 데 도움이 된다. 루가는 새롭게 시작된 공동체의 삶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2-47, 공동번역성서, 밑줄은 저자 강조)

이 공동체가 가진 특징은 주변의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이 공동체는 날로 수가 늘어났다. 이 공동체가 사는 방식은 그 자체로 다른 이들을 이끄는 도구였다. 그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도구였다. 그 공동체 자체가 복음이었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명확한 한 가지 교훈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는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지어 베드로가 홀로 예루살렘을 찾은 유다인 순례자들에게 설교했을때에도, 복음서는 ‘베드로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사도 2:14) 설교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설교를 들은 이들이 단순히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복음 선포는 커다란 경기장에서 ‘대단한’ 설교자가 하는 부흥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개인적인 회심을 촉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선포는 공동체의 일이며,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나는 대학생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뚜렷하게 75퍼센트 이상이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관계가 중심이다.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의미이자 목적이다.

앞서 언급했던 알파코스는 공동체가 선포의 중심이 될 때, 그 효과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준다. 알파코스는 누구나 편하게 참여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한 10가지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매 주제마다 사람들은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토론하며 발견해간다. 진행하는 교회나 개인의 상황에 따라 방법을 바꿀 수 있다. 8백만 명 이상이 알파코스에 참여했고, 성공회, 로마 가톨릭,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구세군, 자유교회, 오순절교회, 하나님의 성회, 가정교회 등 세계 80여 개 이상의 나라에서 수만 가지의 모든 형태의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수감자 및 대학생, 청년, 군인과 같은 다양한 상황에서도 진행된다. 알파코스를 진행해온 캄팔라에 있는 교회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제자도의 성숙을 이루었다.

사마리아의 필립보와 에티오피아 내시 - 사도행전 8장

필립보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도시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일대일 만남을 통한 복음 선포에서도 좋은 예가 되었다.

이야기는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람에 살던 3천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울(후에 바울이라 불리는)이 시작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흩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놀랍게도 이 이야기의 시작은 박해를 슬퍼하거나 자신들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흩어져 간 신도들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고 기록되어있다. 필립보는 이들 중 한 사람으로, 그는 사도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명령(사도 1:8)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한 예로 이야기에 등장하게 되었다. 필립보는 사마리아의 한 도시로 내려가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전했다. 루가는 ‘군중들은 필립보의 말을 듣고 또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보고는 모두 하나같이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악령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병자들과 불구자들이 깨끗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다.’(사도 8:6-8)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그의 권능과 표징과 기적을 보여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고, 그 효과는 도시 전역으로 퍼졌다. 이후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함을 통해 그 사역은 인증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 지역의 유다인 공동체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었다. 필립보는 말씀과 사역으로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사역은 후순위로 밀려날 일이 아니다. 표징과 기적들은 사마리아 도시 전역에 복음 선포가 영향을 미치게 된 이유였다. 복음의 선포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임재와 그 권능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사역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특히 주변부로 밀려난 공동체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이는 시대적, 상황적으로 가난과 HIV, AIDS, 전쟁, 그리고 지진, 홍수, 태풍 등의 자연재해로 인해 무너진 많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경험해온 일이다. 우간다의 HIV/AIDS 감염이 절정에 달했을 때, 교회는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다가가라(마태 25장)는 예수의 명령을 따라 HIV 검사와 상담, 공동체 돌봄, 고아 지원 및 감염 및 영향의 상흔을 지우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처럼 교회가 HIV/AIDS가 위험 수준인 상황에서 감염 및 영향을 막기 위한 열정적인 돌봄과 지원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했을때, 많은 이들이 예수께 돌아왔다.

필립보와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 순종한 필립보를 통해 성령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내용이다. 먼저 필립보가 가야 할 길을 일러준 이는 ‘주의 천사’이다. 두 번째로, 그가 마차를 보게 됐을 때 마차에 바싹 다가서 보라고 말한 것은 성령이다. 매 순간마다 필립보는 성령을 분별하여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낼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순종했다. 나는 필립보가 에티오피아 내시가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던 마차에 타면서도 스스로를 믿지 못했으리라 확신한다. 우리는 둘 사이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필립보는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시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내시였고, 예루살렘에 순례차 갔었고, 여왕의 재정을 관리하는 고위 관리였고,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내시가 예언서에 기록된 내용을 물었을 때, ‘필립보는 이 성서 말씀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말씀을 풀어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35) 예수의 복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것’을 포함한다.(루가 24:47) 이것을 받아들이는 상징적 행위가 세례이다. 가는 길에 물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내시는 세례를 받고자 했다. 사마리아에 있는 도시처럼, 내시의 삶에도 기쁨이 생겼다. 그는 기쁨에 넘쳐 제 갈길을 갔다.

사마리아인들과 필립보와 내시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선포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넘어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이 가야 할 곳에는 그들을 밀어내는 박해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이 이러한 박해를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에 하느님의 통치가 임했음을 선포하는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셨는지 보았다. 하느님은 적대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사울과 스테파노의 죽음을 통해 일하셨다. 오늘날에도 하느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박해와 고난을 감내해야만 하는 상황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본 것처럼, 필립보와 에티오피아 내시의 만남은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큰 도전 중 하나는, 우리가 복음 전파를 위해 방법과 전략, 조직과 기술에 너무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역사와 문화, 라이프스타일의 잡음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식별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악마는 예수께서 ‘기도하지 않고서는 쫓아낼 수 없다’(마르 9:29)고 말씀하신 그 악마와 같은 것이다. 기도를 복음 선포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시 발견하는 것이 시급하다.

Young Overcomers가 진행하는 밀드레드 프로젝트의 이야기는 성령께서 항상 예측 가능한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 오버커머스Young Overcomers (YOMs)는 캄팔라의 올 세인츠All Saints 대성당의 지원을 받고 있는 청년 공동체이다. 영 오버커머스의 멤버인 브라이언은 그가 하느님의 목적과 역사하심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2005년 6월의 어느 날, 그는 캄팔라의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밀드레드를 지나쳐가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전날 밤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고뇌했던 참이었다. 그는 멈춰서서 밀드레드와 이야기를 하라는 어떤 이끌림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돈을 주는 대신, 케반도라는 캄팔라의 슬럼가에 있는 그녀의 집에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그가 가난한 이들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의 갈급함을 채우고자 했던 노력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밀드레드의 필요를 보여주신 창이었다. 브라이언은 이것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했고, 그들은 밀드레드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까운 이웃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프로젝트를 함께 시작했다.

오늘날 영 오버커머스는 밀드레드의 가족들을 포함한 빈곤층 가족과 밀드레드 프로젝트를 통해 함께하고 있다. 그들의 미션은 두 가정에게 영적, 물질적, 사회적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방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고, 가정의 대표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기본적인 음식과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가정들과 두 달 간격으로 교류한다. 결과적으로 한 가정의 대표인 임마누엘과 밥 오팀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여, 그들 가까이에 있는 성 요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선포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일이지만, 우리는 필립보가 자신의 몫을 얼마나 신실하게 감당했는지 볼 수 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했고, 사마리아에서의 표징과 기적들을 보여주었고,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캄팔라 사역의 동료인 케투라는 2006년 11월 올 세인츠 대성당의 복음 선교 강조 주간에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을 듣고 보는 것이 캄팔라의 슬럼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게 된 통로가 되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활동은 팀을 구성하여 슬럼가의 집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비누나 설탕 등 필요한 생필품을 전해주며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50대 후반의 프레다는 올 세인츠 대성당의 전도팀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키품비라의 슬럼가에 살던 다른 두 명의 신자와 함께 팀을 꾸렸다. 그들의 선교지는 바로 이 슬럼가였다. 그들은 비누 2개와 설탕 2Kg을 준비했다. 그들이 어떤 집을 방문할지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들은 한 노년 여성이 베란다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비통해보였고, 넋이 나간 것 같았다. 프레다는 그녀에게 가서 간단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세 사람 모두 동의했고, 그들은 그녀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 노년 여성은 그들에게 몇 차례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올 세인츠 대성당의 신자였던 한 지역 주민의 위선을 비난하면서 ‘당신 말야, 평생 그리스도인이라 했던 당신은 평소에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방문객이 마을에 찾아오니까 나한테 인사를 해? 꺼져!’ 프레다는 매우 공손하게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노년 여성은 프레다에게 그녀의 하느님과 함께 가버리라고,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프레다는 ‘하느님 얘기는 치워두고’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노년 여성은 계속 화를 내며 가버리라고 말할 뿐이었다. 프레다는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프레다가 그녀를 떠나려던 그 순간, 자신이 만나는 이들에게 나눠주려고 가져온 설탕과 비누가 떠올랐다. 프레다는 말했다. ‘음.. 저희가 할머니 드리려고 비누와 설탕 좀 가져왔어요. 이거 받으세요. 저희는 갈게요’라고 말했다.

노년 여성은 그것을 받아들고 즉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프레다에게 집 안으로 들어올 것을 청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으나, 프레다는 일단 들어가서 앉았다. 노인은 늦게 낳은 자기 자녀의 사진과 손주들의 사진을 프레다에게 가져와 보여주었다. 그리고 프레다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설명해달라고 말했다. 노인은 아무도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 외로움, 누구도 자기를 환영하지 않는 외로움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프레다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은 이내 눈이 붉어지며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프레다도 참을 수 없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노인은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회복시켰다.

케투라는 이 사례에 관한 이야기를 주간 활동 보고를 통해 나누었고, 그 슬럼가의 리더 중 한 사람인 공동체 회의 의장을 포함하여 그곳의 65명의 성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였다.

아테네에서의 바울 - 사도행전 17:16-34

아테네에서 있었던 바울의 선교와 아레오파고에서의 공개 설교는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도 그리스도교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과 그들의 사회 안에서 어떻게 선포를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당시의 아테네가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그 도시의 문화와 사람들을 알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그는 도시에 만연한 우상숭배로 인해 충격을 받고 괴로워했다. 그는 그곳의 유다인과 신을 두려워하는 그리스인들이 도시의 이곳저곳, 회당과 시장, 그리고 광장에서 벌인 많은 토론들에 참여했다. 바울은 종교-문화적 역사와 관계 없이 하느님 나라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떤 문화나 사람도 하느님 나라 밖에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복음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역할은, 그들의 이야기와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유다인들과 신을 두려워하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기대 사상을 입증한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했다. 유다인들의 역사를 아는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목적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단서가 되는지 보여주었다. 유다인이 아닌 아테네의 청중들에게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예수님이 바로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사도 17:24)의 독특하고 충만하고 완전한 계시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바울은 이 대화에서 복음서의 내용뿐만 아니라 창조에 관한 이야기도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창조의 하느님을 계시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울은 그리스인들의 저서들을 인용하여 그들의 유산 속에도 하느님이 계시되어 있고, 그분의 목적이 그들과 관계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유다인과 그리스인, 그리고 세상의 다른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의 희망이다.

아테네에서 바울이 했던 복음 선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확실한 한 가지 교훈은 복음의 메시지 선포 안에 사람들의 문화와 삶을 녹여내는 것의 중요성이다. 경청과 대화는 모든 문화와 시대, 사회에는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담겨 있다는 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테네인들이 ‘알 수 없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만들어둔 것도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고, 바울은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통해 복음을 선포했다. 하느님이 통치하신다는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과 문화 안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의미이다. 역사 속의 모든 문화와 시대 속에 하느님의 실재를 나타내는 표징이 있다. 우리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복음이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그가 통치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청과 대화는 그 문화와 맥락의 언어를 배우는 것을 동반해야 하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복음을 그들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선포를 그들의 말로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모든 복음의 선포는 충분히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로 행해져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경청과 대화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많은 선포 방식들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고, 새로운 언어를 듣는 이유는 그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자신들의 일상 언어로 기록된 성서를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우선임을 보여준다.

특정한 맥락에서 복음 선포를 위해 사용되는 언어와 방법은 중요하다. 우리는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각 문화와 사회는 그만의 독특함이 있다. 도시화된 아프리카는 교외 지역과는 다르다. 탈공산주의 사회는 탈그리스도교 사회와 다르다. 그리고 이슬람교나 힌두교, 불교가 강세인 지역들도 많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단순히 명목상으로 그럴 뿐,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가지의 방법을 모든 곳에 적용시키실 것이라 넘겨짚어서는 안 된다.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효과적이었던 프로그램을 아프리카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 마구 팔아대면서 이런 실수들이 흔히 벌어지기도 했다.

결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최우선적 목적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며 이것을 분명히 하셨다. 사도들 또한 그들의 편지에서 이를 다시 이야기했다. 사도 베드로는 로마 제국 치하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믿음의 형제들과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1베드 2:9-10, 밑줄은 저자 강조)

우리는 종종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한 개인이나 교회, 심지어 교회의 어떤 조직에 국한된 일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복음의 선포는 교회 공동체 모두가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일이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는 사람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 시대와 오늘날에도 그를 따르는 이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삶과 대화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의 말과 언어와 연결되어 우리를 통해 그분의 용서와 화해의 사역을 드러낸다. 우리는 순종해야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를 식별하기 위해 문화와 맥락에 귀를 기울여야 할 책임이 있다. 경청과 대화는 수많은 각기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맥락 안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그것들을 이해하고 체화하기 위한 역동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의 궁극적 주체는 성령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요한 16:8)이기 때문이며, 사람들을 회개와 용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화해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공동체와 삶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이는 성령을 인간의 독창성이나 전략 및 기술로 대체하려는 이 시대에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완성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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