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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포천 나눔의 집 노승훈 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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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브랜든연구소
작성일 2016.08.21 10:00 조회 5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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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소개합니다. 

오늘은 포천 나눔의 집에서 사목하는 노승훈 부제님의 설교입니다.


루가 13;10-17


불교에 ‘불재가중(佛在家中)’이란 말이 있습니다. 당나라 때 양보(楊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천에 유명한 무제(無際)보살이 있다 해서 집을 떠나 먼 길을 향했습니다. 한참을 가던 양보는 한 노인을 만나서 어디를 가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에 ‘무제보살을 스승으로 삼고자 길을 가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보살을 찾아가느니 부처를 찾으러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양보가 놀라며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자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집에 가면 이불을 두르고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 나와서 맞아주는 분을 만나게 될 텐데, 그분이 바로 부처시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자, 양보는 이불을 두른 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오는 어머니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양보는 ‘집안에 있는 부처’를 견성(見性)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이야기 속 주인공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에 귀를 기울이며 듣게 됩니다. 헐리우드 액션영화라면 주인공이 초인적인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죠. 로맨스 영화라면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 주인공이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가 전개됩니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이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을 다루게 됩니다.


방금 들려드린 양보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가 부처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알고 보니 진짜 부처는 멀리 있는 게 아니더라는 내용으로 요약이 됩니다. 엄청난 걸 깨닫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 진짜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느라 더 우선해야 할 진리를 등한시 하는 회당장과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안식일의 율법을 지키겠노라 애를 쓰지만, 정작 그 율법이 네 생계와 관련된 부분에 있다면 적당히 어기며 살지 않느냐.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당시 이스라엘 율법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율법 중 하나였습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이었으니, 절대 지켜야 할 항목 중 하나였죠. 그러나 예수님이 언급하신 대로, 누구도 그 계명을 온전하게 이행할 수는 없기에 소나 나귀의 물을 먹이는 것을 허용해 왔습니다.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소나 나귀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 일정 거리 이상을 이동시키지 않는 조건 하에 풀과 물을 먹이는 것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억지로 법을 만들고 그걸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좀 구차해 보이지 않나요. 꽤 번거롭죠. 아무튼 이들은 본인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예외조항을 만들어 가며 자신들의 행위는 합리화를 해놓고선, 정작 사람을 살리신 예수께는 율법을 들이대며 딴지를 거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는 정면으로 반박을 하신 것이죠. 예수께서 회당장과 그의 무리를 꾸짖으시는 모습은 이래서 속 시원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이야기를 들여다봅시다. 고침 받은 여인에 대해서 말이죠. 왜 이 여인은 안식일에 주님을 찾아왔을까요. 애초에 이 여인이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왔다면 문제가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요? 그 누구도 불만 없이 이야기가 잘 풀렸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적을 만들지 않고, 율법학자들도 망신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도대체 왜 일을 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는 것을 다 아는 안식일에 예수를 찾아간 것일까요. 그녀는 믿음 있는 여성이었으니 언제 찾아가도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꼭 그날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혹시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딴지를 걸기 위해 미리 매수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율법학자들의 부덕함을 드러내기 위해 하느님이 미리 계획하신 것은 아닐까요? 여러 가지 음모론적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실일 수도 있죠. 하지만 더 간단한 추측이 정답일 수도 있습니다.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장애 있는 여성이 생계를 이어가려면 더 많은 노력과 고생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십팔 년이라는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아온 그다지 유복한 인생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치유이적 사화를 보면 가족이나 친구가 대신 예수를 찾아오는 사례가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예수를 찾아와 고침 받는 경우는 나병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정하다 낙인이 찍혀 사회에서 배제된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길에서 도둑처럼 달려들어 고침을 받곤 했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그 정도로 배제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도와줄 사람은 없었던 듯 보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예수님을 찾아가야 했던 건 그녀 입장에서 볼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고침 받은 여인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돌아본다면, 문제제기하는 회당장은 정말 천하의 못된 놈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어 빠듯해 시간을 낼 수도 없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도움을 구하고자 안식일에 시간을 겨우 고침을 받았건만, 그것이 불법이라고 언성을 높이다니.


제가 근무하고 있는 이주민 지원센터의 이주 노동자 상담은 주일에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도 예배 후엔 상담을 해야 합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쉬는 날이 오늘 뿐이기 때문이죠. 그들의 입장에서 주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닙니다. 일하느라 채우지 못했던 것들을 채워야 하는 시간이에요. 하루 열 시간 열두 시간씩을 일하는 이들에게 다른 여유는 없습니다.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것도 쉬는 게 아닙니다. 이들에겐 생존을 위한 보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당장이 예수께 이의를 제기한 건 그들이 율법을 자기 편한대로 해석해서만이 아닙니다. 약자의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16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십 팔 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 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 하셨다.


예수께서는 반대하는 이들에게 약자의 고통 받는 삶을 그대로 들려주십니다. 회당장이 외면하고 있던 약자의 삶을 말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로운 예수가 부덕한 회당장을 혼내준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안식일이 찾아올 수 밖에 없던 등이 굽은 여인의 고통스러운 삶입니다.


처음에 들려드렸던 양보의 이야기도 다시 살펴보죠. 이야기는 양보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양보가 얼마나 철없고 무책임한 사람인지 드러나게 됩니다.남편도 없고 오직 외아들 하나를 두고 사는 여인이 공부를 하는 그 아들까지 먹여 살리기 위해 고생했을 시간은 얼마나 지난했을까요. 그런데 이제 그 아들마저 보살을 만나겠다며 집을 나갑니다. 지금보다 더한 가부장 사회였던 당나라의 시대상 속에서 홀로 남은 이 과부의 삶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집으로 돌아온 양보의 결말은 깨달음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삶의 희망이 회복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진정한 스승은 가까이에 있다’는 교훈을 얻기 위해 이 이야기는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그 안에 삽입되어 있는 약자의 삶을 지나쳐선 안 됩니다.


다른 이의 고통에서 삶의 교훈을 찾으려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지만, 의외로 쉽게 발견됩니다.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에서 태어나 다행인 줄 알자’라던가 시리아 난민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의 안보가 저리 중요한 거다’라는 등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약자의 삶을 도구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의 불행을 도구 삼을 수 있다는 건 본인이 가진 삶의 안락함을 과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내 배가 이렇게 불렀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사회적, 실질적 약자들을 앞에 두게 되었을 때 ‘안식일에 도와줘도 되는 거냐’와 같은 안 하느니 못한 말을 내뱉게 되는 것이죠. 약자들의 삶에선 그들이 지닌 질병이나 가난, 차별에 의한 고통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허리 굽은 여인의 고통스러운 십팔 년 인생도 절대로 예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준비된 장애가 아닙니다.


선거철에 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외치는 정치인보다, 그들의 삶에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이동권 보장을 말하고 함께 준비해 주는 이들이 진짜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은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이 망신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뜻을 회당장보다 잘 알고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약자의 삶을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보다 생명을 존중하자'는 당연하지만 모호한 말로 오늘 말씀을 기억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회당장을 향해 꾸짖으실 때, 허리 굽은 여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같이 기억해야 합니다.


아,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왜 주일날에 교회와서 더 힘들게 살라는 말을 들어야 하나 싶은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약자일 때엔 당신의 이웃이 당신의 삶을 돌봐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웃의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의 고통에도 누군가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의 삶을 살펴주실 것입니다. 사랑과 치유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실천, 공감과 연대가 쌓이고 쌓이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율법, 억압의 권력들도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망신을 당하고 여러분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17 이 말씀에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으나 군중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온갖 훌륭한 일을 보고 모두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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