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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오데이 2019년 11월호
끝나지 않는 싸움 ‘여성 성직’ - “나는 착한 목자다”
여성선교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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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쁜이 에스더 기자 소속 성공회원주교회
작성일 2019.11.04 09:52 조회 1,26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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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대학원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당시 주교님을 뵈었는데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나는 임기 내에 여성 성직을 서품하지 않을거야”라는 말씀을 하셨다. 20년 가까이 된 이 말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나에 관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다시 만나면 꼭 여쭤봐야지’ 속으로만 생각하고 어려워서 말을 하지 못했는데 아직도 묻지 못했다.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으셔서 내 서품은 당신 몫이 아닐 텐데도 굳이 의사를 밝히신 까닭은 나의 꼽슬거리는 긴 머리카락 때문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원우회장을 하고 대학원에서 논문을 잘 써서 여성신학에 요약본을 실어보기도 하고 전체 원우들 피정을 계획해 이끌어보기도 하고 나름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나를 싫어할 이유를 스스로는 찾기 힘들었다. 

그 농담이 예언이었을까. 졸업 즈음에 다른 남자 동기들은 발령을 받았는데 나는 겨울방학이 지나고도 발령지에 가지 못했다. 추천을 해준 관할사제가 떠나고 나서 다른 사제 밑에서 훈련받는 기간 코드를 맞추며 고군분투했는데 그분이 내 발령시기에 맞추어 먼저 교회를 떠나셨다. 나와 대학원을 준비 중인 신학생 둘이 교회를 지키게 되었고 나의 발령을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들려오는 소리로 “어떤 교회도 원하지 않아서, 여자여서”라고만 두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 겨울이 낯설고 추웠다. 

신학생 시절에 박사 과정중인 박미현 도미니카 사제께서 두 눈을 마주하면서 진지하게 말씀해주신 말씀을 품고 살았다. “두 가지는 절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봐요. 발령장 없이 임지를 스스로 선택해서 가지 말아야 하며, 무급으로 일하지 말아야 해요.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 이야기의 의중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다. 존재여부를 의심받는 사람이 정식 절차나 결정 없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면 나중에는 없는 이가 되어 버리는 게 현실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침묵 끝에 꽃피는 봄이 오는 시기에 원주에서 편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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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둘 딸린 여성 사제 

시간이 많이 흘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리고 또 낳았다. 첫째도 젖으로 아이를 키웠기 때문에 둘째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둘째 때는 맡은 게 더 많아져 걱정이었지만 ‘둘째 아이를 낳으면 어디서든 젖을 먹이고, 데리고 다니면서 목회해야지’ 하고 다짐했다.(젖을 먹이면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한번은 동료가 전화를 했다. “고민이 있다”고, “어떻게 아이 둘을 데리고 목회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지” 나에게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전화는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도 여러 번 고민을 해본 일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진지했다. 그 전화가 마음의 기도를 청하거나 용기를 달라는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기도 시간을 어떻게 배치하고 있는지, 밤에는 아이를 어떻게 하는 건지, 또 그런 사소한 일을 걱정하는 자기 모습을 보이는 게 신자들에게 좋은지, 심방이나 공기도 시간에 아이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심지어 그렇게 크는데 아이는 괜찮은지 이런 질문이었다. 

마음속으로도 수십 번도 더 그려보는 장면이기 때문에 담담하게 대답해줄 수 있었다. “나는 그냥 데리고 해요. 그리고 어떨 때는 쩔쩔매요. 어떨 때는 기도가 잘 진행 안 되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익숙해서 제법 잘 있어요. 하지만 날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모든 통로를 다 활용해요.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그게 나예요. 애 둘 키우고 있는 엄마 사제, 그게 나예요. 깔끔하게 옷을 입고 마음의 동요가 하나도 없는 어려움이 없는 사제가 아니라 키우고 있는 어려움을 아는 사람, 아이를 달래느라 쩔쩔맬 줄 아는 사람 그게 나라는 걸 보여주죠. 그것이 제 성직 수행에 중요한 잣대 같아요. 그래서 잘 못해요” 그 말끝에 나는 울어버렸고, 상대도 대답을 못 해 우리는 한참을 침묵 속에서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존재의 증명 

“좋은 사제가 어떤 사람이에요?” 기도가 깊으신 분과 어느 좋은 날 산책할 일이 있어 여쭤보았다. 한참 숨을 고르더니 “좋은 사제는 좋은 사람이지. 참 사람, 진짜 사람으로 사는 사람”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길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좋은 사제, 사제에게 숙명처럼 따라 다니는 명제, ‘내 양들을 잘 먹이는 목자’로 살고 싶다는 바람은 순수하고 선하다. 그래서 화두처럼 성직자들은 가슴에 이 말을 품고 사는데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느님은 누구이며 왜 나를 여기 보내셨는가’를 알아야 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 앎 없이는 좋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 ‘나’는 그 분의 중요한 베풂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성직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다른 은총을 부어주셔서 공동 이익을 위해 부르셨다. (1고린 12장). 우리는 다 다르기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그 기준이 타인의 시선이나 기존 관습이나 타인의 선입견에만 머물다 보면 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 성직에 대한 기도는 누구에게도 기도이며 싸움이 될 수 있다. 자기를 만나지 않고 그저 누구가의 기준에만 맞추려고 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께 기도해야 한다. 나는 여기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부르신다.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으면’ ‘부제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달라졌나 돌아보게 된다. 그런 말을 후보생 시절에 듣고 듣다 보면 내 자신이 싫어지고 나의 선택을 포기하거나 물러서기도 한다. 

눈물의 안수 

여성 성직자들의 서품 풍경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제도에 없어서 제도를 만드는 일부터 해야 했던 선배 사제는 서품을 받는 날,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라며 복음서를 떨떨 떨리는 목소리로 울면서 읽어 내려갔다. 어찌 안 울수 있겠는가. 당연하지 않은 일, 존재하지 않는 이의 존재가 울려 퍼진 일이었는데, 그런데 신비롭게도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여성 성직자들의 서품식에서 눈물은 자연스럽고도 여전히 빈번하다. 한 여성이 사제가 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을 채우는 메아리처럼 눈물이 흐르고 흘러 사람들의 집중을 끌어온다. ‘여기 있습니다. 제가 존재합니다.’ 

나도 서품받은 날, 울면서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그 안수기도는 나의 고뇌와 경험이 상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듯 느껴지는 신비였다. 그 안수기도의 뜨거운 내 손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 일로 원주 교회에 세 분이 새롭게 오셨다. 가보자고, 나를 위해 울면서 기도하는 분이 계시다고 전도했다고 한다. 

여성성직자후원회 재발족식이 지난 10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교회에서 있었다. 여성성직자회 회장을 맡고 있는 민숙희 마가렛 사제는 “여성 성직이 지난 18년 전 작은 겨자씨와 같이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너른 땅에 가득 퍼져 누구라도 맛보고 건강하게 하는 푸성귀 같기를 바란다. 그것은 함께 기도하는 손길로만 가능한 일이다. 씨앗이 뿌리내리고 땅 가득 푸르를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자”며 인사말을 전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1:1)의 복음이 모두에게 실현되는 일은 여성성직의 푸성귀 밭이 이루어지는 날 더 확장되리라고 믿는다. 하느님의 복음은 모든 이들의 해방이기 떄문이다. 여성 성직은 누구에게도 막힌 것을 없애고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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