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오데이 2019년 11월호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복음 - “예수 나셨네”
작은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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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해고 승무원들과 함께하는 거리기도회
몇 해전, 내가 있는 길찾는교회는 사순절기와 대림절기 동안 KTX 해고 승무원들과 함께하는 거리기도회를 했었다. 그들은 2006년 3월부터 4000일 넘도록 부당한 해직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측과의 오랜 투쟁과, 고등법원에서 이겼던 싸움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뒤집히며 (이후 이 판결은 박근혜 정부 당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의 일부로 의심되었다.) 이들의, 아니 우리의 싸움은 쉽지 않은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그 연대의 기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가 신앙하는 복음은 일상을 옷입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도래가 그러했듯 우리의 신앙은 억울한 사람과 연대할 때 의미를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17년 성탄 즈음, 성공회 나눔의집협의회와 정의평화사제단 등과 함께 연합감사성찬례를 가지게 되었고 예배를 기획하면서 가장 깊게 고민했던 것은 그 곳에 모인 이들과 더불어 어떤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대림절기 동안 기도회를 하면서 묵상했던 것은 억압과 압제의 시대, 공의를 무시하는 권력자와 신앙의 대상을 ‘소유’에 맞춘 종교인들의 세상에 우리가 바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성탄의 아침에 만나는 그리스도를 다시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으로 누구를 위해 오셨는지를 함께 묵상할 수 있을 만한 노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일이었던 24일 아침. 나눔의집을 가던 지하철 안에서 노래를 만들었다. 뭔가 감동적인 일을 만난 것도 아니었고 천상의 하모니가 머릿속에 울려난 것도 아니었다. 서울로 향하는 1호선 전철 안,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답답해하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떠들던 그 공간에서 일상처럼 초라한 구유의 예수를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노래와 이야기, 책과 영화들로 칭송되어 왔던 구유의 예수가 내 의식 속에선 초라하고 연약하고 가난했다. 누울 곳조차 마련되지 않았던 환대받지 못한 존재. 그것이 내가 묵상한 성탄의 예수였다.
스마트폰을 꺼내 간단하게 가사를 스케치하고 성서구절을 암송하듯 멜로디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악보를 그려 당일 오후 예배에서 미리 정했던 곡을 빼고 처음으로 불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길찾는교회 사람들은 이 노래를 격려해주었고 마치 수십 번 불러본듯 노래의 의미와 정서를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갔다.
성탄의 아기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이가 성탄을 맞이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방이 없어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일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의 방향이나 계급적 차이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그리스도 신앙 전통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아주 선명하게 말해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 환대받지 못한 연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가진 자와 권세자로서 모든 부유한 이들의 축하를 받는 왕의 자녀로 태어나지 않은 예수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 깊이 있는 신학적 성찰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겠으나 학자로서의 탐구 과정 없이도 쉽게 알 수 있는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취를 이룩한 존재로 오지 않으셨다.
그를 맞이한 존재들이 누구였는지를 살펴보는 것 역시 의미있는 일이다. 당대에 천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목동과 양떼, 종교가 다른 이교의 박사들.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 역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종교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의 입장에선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아기 예수는 그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부활의 날을 맞이했던 이들이 누가 첫째인가를 다투던 남성 제자들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로 인해 성서에 제대로 기록되지도 못했던 여성 제자들이었던 것과도 상통한다. 성탄의 예수와 부활의 예수를 맞이했던 사람들은 여러 맥락의 경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교회의 계절을 살아내는 것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의 여정,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전해진 복음의 실체를 가늠하는 일이다. 또한 우리에게 인접한 이 시대와 공간 속에서 복음적인 일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일시적인 예배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항시적인 신앙의 일상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림절기와 성탄, 사순절기와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절을 통과하는 교회의 계절을 살아내는 것은 찰나의 종교적 위안을 넘어 항시적인 신앙을 만들어준다.
신앙의 항시성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누구를 만나 무엇을 말하며 어떤 이유들을 위해 기도하느냐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머릿속의 이상이나 상시적인 관습의 경계를 넘어 일상적이고 항시적인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러했듯 계급과 민족,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
길찾는교회가 누군가와 연대할 때, 그리고 내가 누군가와 연대할 때, 그 대상은 철거민일 때도 있었고 해고노동자일 때도 있었고 성소수자일 때도 있었다.
그 연대의 자리에서 만난 복음 중 현장에 머무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사람 모두에게 깊은 위로가 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연약하고 가난한, 배제되고 소외된, 실패하고 빼앗긴 자로 예수는 태어났고 그의 탄생과 부활을 맞이했던 사람들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꿈을 함께 꾸는 우리들은 그가 말했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 슬퍼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옳은 일로 고난을 당한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원한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 추구해야할 가치이며 살아내야 할 일상이다.
이 노래는 처음 듣는 사람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서 조금은 찬송가풍으로 작곡을 했다. 멜로디를 진행할 때도 최대한 어려운 진행은 피했고, 첫 시작이나 마무리는 흑인 영가에서 많이 쓸 법한 진행들을 차용했다.
당김음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여 가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심했고 성별에 상관없이 편하게 부를 수 있게끔 조성도 주의해서 선택했다.
다만 코드는 초보자에겐 조금 어려울 수 있는 진행으로 구성했는데, 쉽게 편성하자면 기본적인 3화음만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쉬운 곡조로 작곡되었다.
2017년 성탄절 아침, 오전 11시. 서울역 역사 내 3층에서 드렸던 연합감사성찬례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거기 함께 모인 사람들과 같이 울며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이했다.
(2018년 7월말, 한국철도공사와 전국철도노조와의 교섭을 통해 해고 승무원 180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기로 합의했다. 투쟁 4526일, 12년 만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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