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마당웹진

미시오데이 2020년 2월호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⑴
21세기 선교: 지구촌 선교 5대 지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켄 야나칸 / 황윤하 라파엘 번역 기자 소속 성공회 강남교회
작성일 2020.02.05 10:00 조회 1,016회 댓글 0건

본문

켄 야나칸은 인도의 신학자, 교육자 및 환경학자이다. 그는 워크숍, 세미나 및 컨퍼런스에서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인도의 비틀즈’로 알려진 ‘트로얀즈Trojans’에서 활동했던 음악가이기도 하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는 선포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선포되었고, 그는 이 특별한 일을 위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렸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가 4:18).’ 2천 년이 지나 그 복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교회로부터의 새롭게 갱신된 약속이 요구된다. 1996년 잉글랜드 성공회 의회에서 결의된 ‘선교 5대 지표’는 때맞춰 이 임무를 일깨워주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는 선교에 대한 총체적 이해다.

선포란 무엇인가?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선포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지금도 영국 법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 시대의 선포는 왕족으로부터의 공적인 발표였다. 성서에는 ‘선포’라는 단어에 대한 몇가지 용례가 있지만,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항상 전달자가 말이나 글로 받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이 단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루가나 바울은 단순한 전달부터 좀 더 명확하게 중요한 보고를 하거나(사도 14:27, 15:4) 명령한다는 의미(사도 17:30)의 범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우리가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의미와 같이 선포proclaiming나 선언declaring을 사용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오직 이 단어를 신학적 의미로 사용하는데, 왜냐하면 요한의 저작은 구원의 시대, 다가올 사건의 예고와 대비되는 현재 실현된 종말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약을 읽으면 명확해지는 한 가지가 있다. 선포는 어떤 특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제시되는 모든 중요하고 다양한 관점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다양한 맥락에서, 때로는 거부하는 맥락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깨달음이다. 모든 맥락에 맞도록 고안된 어떤 고정된 형태도 없고, 검증된 공식도 없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의 적용과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는 동의어

예수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회개하고 믿도록 사람들을 불렀다(마르 1:15). 그것은 긴급한 일이었다. ‘때가 왔다’와 하느님 나라는 예수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긴급함 외에도, 복음은 바로 이 하느님 나라가 가깝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에 있다. 예수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복음 선포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예수라는 사람과 그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는 분리불가하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의 성명서는 분리된 말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와 예수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은 루가복음 11장 20절의 선언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를 생각해보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악마에게 행해진 예수의 능력은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준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가 존재하고 그의 권능을 펼치는 곳 어디에나 있다.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에 주목해보자.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안에’ 있다고 잘못 이해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까이에, 우리를 둘러싸고, 심지어 우리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확한 의미는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곳,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느님 나라를 미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그가 존재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지적했다.

우리가 사는 현재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교가 가지는 중요성은 하느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곳 어디에나 세워진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선포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선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임할 것이며, 그로 인해 악마들은 떨고, 악마적 기반들은 무너지며, 구조악은 심판받고 모든 사람들이 해방될 것이다. 하느님의 권능은 우리의 선포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번영 신학의 다양한 형태들로 나타나는 승리의 선포나 비현실적 약속을 제공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선포가 승리를 마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무관심한 형태의 설교가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무관심과 적대가 증가하는 가운데에서도 신실하게 선포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 대한 연구는 선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그들에게 복음을 강제로 밀어 넣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다양한 창의적 방법으로 심는다. 이렇게 신실하게 심어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들은 미래에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

(마태 13장)은 지금 보이지 않거나 작은 것들이 언젠가 우리의 이해를 넘어 영향력을 끼칠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때, 우리는 그 영향력을 보거나 느끼기가 어려운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하느님의 때에 볼 수 있기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심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다.

미래와 현재

우리는 예수께서 현재의 하느님 나라뿐만 아니라 미래의 하느님 나라도 이야기하셨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이는 지금 우리가 뿌리는 씨앗과 미래의 하느님 나라의 성취를 긍정적으로 연결시키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혹스러운 측면이 될 수 있다. 예수는 이 뚜렷하게 다른 측면을 분리해서 이야기했지만, 자주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우리는 현재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언급한 것들을 주목하고 있지만, 예수는 미래에 있을 격변하는 사건을 명확하게 짚었다. 이것은 마태오 24장, 마르코 13장, 루가 21장이 전하는 마지막 날의 대화에서 볼 수 있다.  앞으로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다른 언급들도 있다. 마태오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올 것이라 전한다(마태 16:27-28). 마르코는 권능을 떨치며 올 하느님 나라를 전한다(마르 9:1). 마태오 26장 29절이 전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서 제자들과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시기 전까지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말한다.

최근 수십 년간,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같은 학자들에 의해 진행된 이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는 성서의 강조가 역사 전반에 걸쳐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의 선포는 역사를 미래로 이끄는 현재뿐만 아니라, 중요성을 현재에 주는 미래의 힘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래의 영향은 현재에 미치며, 교회가 멀리 있는 꿈의 메시지에 현혹되지 않고 오늘날 이 세상에 징표와 영향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한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부르는 것이지 미래에 있을 성취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서 우리는 미래의 현존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말하는 이해로 후퇴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적으로 두 지평을 화해시키는 일에 도전해야 한다. 이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오늘날 하느님 나라의 영향력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내일 안에서 드러나는 알 수 없는 신비 모두를 강조하게 된다. 이 둘은 완전하게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상호 의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의미와 오늘날 우리가 하는 선포와의 관련성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선포하는가?

예수는 무엇을 선포했는가? 루가가 기록한 힘 있는 선언을 보자.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이사야서의 인용은 예수와 그의 사역을 예언자가 상상했던 일의 성취와 연결시킨다. 예수가 자신을 성령의 힘으로 가득 찬 종의 역할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내렸기 때문이다(미가 3:8). 루가는 초대 교회의 탄생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경험과 유사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예수가 전한 복음은 무엇인가?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묶인 자가 해방되는 것같이 예수가 전한 복음은 실천적 차원의 것이며, 예수가 이 땅에서 행한 사역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선포는 단순히 영적인 위로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제 세상에서 실천적 영향을 위한 것이다. 존 웨슬리나 윌리엄 윌버포스가 영국에 끼친 사회적 영향이나 판디타 라마바이가 인도의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끼친 영향도 모두 복음이 선포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지, 영적인 메시지로부터 분리되거나 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드러나야 할 복음의 성격이다.

불가촉천민, 탈락자라 불리는 인도의 달리트(문자 그대로 억눌린 사람)들은 해방시키는 왕국의 메시지를 기다린다. 수백만 명이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백만의 사람들이 해방을 필요로 한다. 인도 사회와 카스트 제도에 의해 억압받는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부이거나 땅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 청소부, 세탁부 등이다. 비록 인도 정부가 그들이 처한 곤경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들을 진행 중이지만, 슬프게도 달리트에 대한 차별은 많은 지역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이 억눌린 자들의 구원이어야 한다면, 인도의 교회들은 이러한 복음을 전해야 하며, 여러 가지 착취로 인해 억눌린 이들의 해방을 이끌어내야 한다.

예수는 또한 바울의 중심이다. 우리가 앞서 고민했던 것들에 비추어,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는 예수를 선포한다’(골로 1:28)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로마 16:25)’을 말한다. 만약 예수와 하느님 나라가 동의어라면 예수와 복음 또한 그러하다.

여기에 복음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 많은 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교’는 부정적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어떤 맥락 안에서 형편없는 증인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비록 교회가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교회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가 있다. 몇몇은 심지어 공개적이거나 비밀리에 예수를 경배하기도 한다! 이것은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맥락 안에서 존재하는 사실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서구 스타일의 전도 방식을 고수하는 대신에 그리스도가 그들의 문화에 녹아들도록 하는 선포의 모델을 찾아내야 한다.

요약하면,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의 측면들을 생각해보자. 먼저 초대 교회의 선포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었다. 단지 예수만이 이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힘과 권능을 주어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고 보냈다(루가 9:1-2). 그리고 다른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냈고(루가 10:1), 그들 또한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까이에 있다'고 선포했다. 이 제자들은 어떤 예언자나 왕도 가지지 못한, 선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루가 10:24).

두 번째, 사도들은 예수를 예언의 성취를 이룬 존재로 선포했다(사도 3:18-26).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메시지의 중심이 부활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게 한 중추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부활 이후, 선포는 부활하신 분에 대한 메시지가 되었고, 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유다 대신 부활의 증인이 세워지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명백하게, 부활은 선포의 중심이 되었다. 부활이 지금 여기 하느님 나라를 성취하도록 하는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선포로서의 성만찬

역사적으로 교회는 성만찬의 중요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한가지 측면이 있다. 성만찬이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제자들과 함께한 식탁에서, 주님은 “잘 들어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마태 26:29)”라는 매우 인상깊은 선언을 하셨다. 종말론적 차원의 하느님 나라와 현재의 연결은 우리가 하는 선포의 중요한 측면이다. 바울은 애찬the love feast의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린 교회를 책망한 뒤에,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는 말로 고린토교회를 상기시켰다. 성만찬은 하느님 나라를 기뻐하는 것과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가지는 가치를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 땅에 펼쳐질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이 땅에 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맛본 첫 열매를 기뻐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주님의 식탁에서 미래는 현재가 된다. 이 경험은 하느님의 사람들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압도적인 경험이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이 기쁨을 의미 없는 성사들로 만든 제도적 틀에 사로잡혔다. 성만찬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구원자가 존재한다는 기쁨을 통해 우리를 구원된 하느님의 백성으로 묶는다. 그러나 이 기쁨에 머무르기보다,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내진다.

선포의 두 모델

우리는 지금 종교적 근본주의의 거센 압박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이 바로 선포에 대한 우리의 실천을 돌아봐야 할 시기이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복음 선포는 대립하는 종류의 선포여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 반면, 다른 이들은 다른 창의적 설명의 힘을 보여줘 왔다. 우리가 어떤 방식에 끌리든, 없애야만 하는 태도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대립에서 흔히 봐왔던 정죄와 오만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나누었던 선포의 방법을 전한다. 청중은 유대교인이었다. 오순절이 되어 다양한 나라들로부터 온 이스라엘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사도 2: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된 예언이 성취된 그날 성령이 부어졌다. 그리고 베드로는 바로 그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사도 2:21)’라고 말했다. 예수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날, 그의 영을 부어 그들이 계약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실 날을 기다렸다. 베드로의 선포는 솔직했다. 부활 이전의 겁에 질린 제자였던 모습에 비하면 대담하기까지 하다. 그는 예수를 권능과 표징과 경이로움을 가지고 오신 분으로 드러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임당했고 하느님은 그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바로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다(33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를 주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34-36절). 베드로는 그에 대한 사실들을 매우 담담하게, 심지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다인들에게 전한다. ‘마음이 찔린’ 그 청중들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명확했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시오’(38절). 베드로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또 간청했다(40절). 그래서 3천여 명의 사람이 그들의 동료가 되었다. 이런 형태의 선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많은 수가 이에 응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성서에서 사용된 선포에 대한 단 하나의 모델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의 많은 곳에 맞지 않는 모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방법과 형태의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전도자들은 마치 그들이 북아메리카에 있는 것처럼 대립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은 아메리카의 전도자들처럼 차려입고, 심지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대안도 고민하지 않는다. 공격적인 ‘십자군’들이 여전히 돌진하고 전투적인 언어가 이미 입은 상처에 대한 고민도 없이 마구 사용된다. 식민지 시대를 연상시키는 자만이 여전하고, 사람들은 그런 표현에 반응하고 있다.

유대교인들에게 대립적이었던 베드로와는 다르게, 아레오파고에서의 바울의 연설은 복음과 아테네인들이 경배하는 것 사이의 연속성을 만들려는 시도이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사도 17:22)”는 매우 긍정적인 도입부이다. 그는 그를 이러한 결론으로 이끌어간 몇 가지를 분명히 관찰했으며, 그중 최고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이었다. 바울이 세운 연속성은 오늘날 우리가 선포에 대한 교훈을 찾아야 할 이유이다. 예수께서 이방인 백인대장의 삶을 칭찬하도록 만든 ‘알지 못하는 신에게’였지만, 바울이 아테네인들을 칭찬하게 한 그 ‘믿음’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물질로 만들어진 우상이 아닌 참된 신에 대한 그들의 깊은 갈망을 칭찬했다. 이러한 접근은 참된 신을 예배하고자 하는 깊은 갈망을 가진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아시아에서 발전되어야만 한다. 몇몇은 우상을 거부하지만, 우상숭배에 갇힌 이들조차도 하느님을 갈망한다. 전통적으로,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활동해온 선교사나 현지의 전도자들은 칭찬보다는 정죄를 행했다. 누군가의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믿음의 급격한 불연속성을 제시하는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슬프게도, 많은 이들을 공격하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시위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 정죄하는 방식의 설교가 여전히 오늘날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많은 신실한 예배자들의 종교적 실천이 죄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종교를 깔보며 우월한 태도를 취했다. 이것이 우리의 선포를 막는 유일한 장벽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과 우리가 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살펴보는 것이 시급하다.

바울은 아테네인들의 신실함과 그들이 구축한 개념, 혹은 하느님 개념이 없는 상태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이보다 더 긍정적인 복음 선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많은 접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신실함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이 단지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이 예배하고 있던 알려진 신들에 대해서도, 참된 신으로 이끈다는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칭찬하지 않았다. 그는 명확하게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내재된 종교적 태도를 보고자 했다.

교회와 교회의 선포

종교개혁 직후, 선포는 교회의 존재에 매우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루터나 칼뱅 같은 이들은 로마 교회의 제도화된 이해와 싸우고 있었다. 루터는 참된 교회의 특징들을 열거했으나, 오직 말씀을 전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었다. 루터는 교회는 순수하며, 순수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교회는 말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교회에 대한 이해에서 선포가 맡는 중요한 역할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약성서와 드러난 하느님 나라가 수반하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개혁자들의 선포에 대한 강조는 완전히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확실히 일부 교회는 복음 전파적 선언을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약속을 말하지만,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완전히 무시한다. 전자는 교회를 늘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다. 모든 신자들에게 나가서 다른 이들에게 우리 교회로 오라고 이야기하도록 압박을 주는 것이다. 후자는 교회를 ‘성사를 보기 위해 모여서 선포를 듣는 것에 아주 조금 집중하거나 혹은 전혀 집중하지 않는 곳’으로 본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의 선포와 방법이 새로운 의미를 갖도록 반드시 새롭게 고려되어야 한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의 충성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메시지가 실체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선포는 긴급한 것이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 세상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들어야 하지만, 이 메시지에 대한 확실한 행동을 보고자 한다. 예수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인간 예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다. 예수와 그의 메시지가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입증되는 것을 통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실제적 표현을 동해 하느님 나라를 구체화시키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선포

복음(하느님의 능력)은 역동적이며 정적이지 않다. 이것은 각각의 현지 상황과 시대의 필요에 맞춰 계속 새로워진다. 역사적으로 자유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온 세계가 받아들였던 전 세계적 선교 운동의 시기가 있었다. 이는 엄청난 운동이었다. 굉장한 몇몇 개인의 회심도 있었다. 오늘날 지구촌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복음 선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은 ‘선교사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역동적인 메시지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맥락을 다룰수록 자라난다. 내용은 같고 결과도 같지만 전달 방식은 다양하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와 직면해야 한다. 잘못된 것들은 드러나야 하며, 사람들을 회개시키고자 하는 하느님의 고민은 열정적으로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맥락에서 필요한 선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만연한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최종적 계시를 선포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이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에게 섬세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약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우리의 맥락에서 메시지를 새롭게 선포하는 최선의 방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포는 성서에 계시된 독특성, 즉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기반으로 해야 하지만,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목적과 관계없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 자신이 그의 삶과 사역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현실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의 권위를 가지고, 듣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까이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것이 예수 자신이 하느님 나라라는 사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임을 보았다. 우리를 향한 그의 친밀함은 하느님 나라와의 친밀감을 나타낸다. 교회가 신실하게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분의 말씀을 선포하고자 한다면, 삶을 통해 그 메시지를 살아내고자 한다면, 주 예수의 존재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세상에 준다. 하느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채워질 때, 그들의 말과 행동은 하느님 나라와 일치한다. 교회의 삶 안에서 구체화된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견고한 기반이 된다.

사도 요한은 선포를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아버지와 함께하는 영원한 삶을 선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으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에게 전하는 것이다. 너는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개인적인 이 경험이 나눠짐을 통해 다른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1요한 1:2)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