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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오데이 2020년 2월호
용기가 필요한 기록, 용기가 필요한 발걸음 : 차별과 혐오를 넘어 자부심으로! POP 프로젝트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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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엔틸드 기자 소속 성공회 길찾는교회
작성일 2020.02.05 10:00 조회 69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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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모먼트

오후 늦게 집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려고 지상으로 빠져나오는 계단, 바깥이 시끌시끌합니다. 멀리 검은 자켓을 입은 사람들, 경찰들도 보입니다. 토요일의 시내, 특히 종로 지역은 집회와 시위로 바쁘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일깨워줍니다.

곁을 지나며 흘끗 본 풍경은 흔히 참여하던 노조 집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기에 찬 구호를 선창하면 길가를 점령한 사람들이 따라 하는 풍경. 왠지 예전보다 다들 목소리가 작아진 것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지나치려는데 걸린 플래카드를 보고서는 웃음기를 거뒀습니다. 작년 말 마사회의 부조리를 죽음으로 고발했던 문중원 열사를 추모하고 사태 해결을 위해 열린 집회였기 때문입니다.

타려던 버스는 우회 경로로 오고 있었고, 걸으나 버스를 기다리나 비슷할 것 같아서 자의반 타의반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습니다. 광화문을 지나려는데 멀리서 깃발들이 행진하고 또 시끄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이건 또 무언가 했지만 의문은 잠깐이었습니다. 갑자기 길가에 “태극기 어르신”들이 보였고, 저 멀리 깃발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렬의 인파는 적었지만 인파의 대부분이 들고 있던 태극기와 성조기 때문에 거대하게 연출되었고, 큰 북소리와 트럭의 노랫소리가 이런 분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익숙한 멜로디에 “문재인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김정은은 물러가라 물러가 박원순은 물러가라 박원순은 물러가 박원순은 물러가라”는 가사가 전부인 노래를 다들 따라 하는데, ‘왜 문재인 김정은은 한 번씩 부르는데 박원순만 세 번이나 부를까?’ 궁금증이 일어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이것도 서울 공화국의 단면일까 싶었습니다.

남의 손으로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독립, 극단적인 좌우의 대립과 분단, 독재정권의 횡포, 형식적 민주화의 쟁취, 그 속에서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을 모두 만나려는 생생한 아카이브가 바로 서울의 종로 바닥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이 도읍으로 지정된 후로 종로 바닥은 늘 ‘코리안 모먼트’의 살아 있는 전시장으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코리안 모먼트가 지워버린 것들의 기록

전시장으로 향하면서 ‘참 징후적이다’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오늘 제가 향하려는 바로 그곳은 코리안 모먼트가 지워왔고 여전히 지우고 있는 차별과 혐오와 고통과 싸움의 기록물을 모은 전시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소수자’여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참 어려웠던, 종로 한복판에서 김두한과 구마적이 일대일 대결을 벌일 때 피맛골 한구석에서 건달들에게 돈을 뺏기고 구타를 당했던 이들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전시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규모도, 내용물도 생각보다 작고 적었습니다. 전시는 크게 “퀴어문화축제 / 차별금지반대운동 / 경남 학생인권조례안 / 대학 내 성소수자 활동” 네 가지를 이슈로 한 미디어 아카이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한국 성소수자의 고통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돌아보기까지는 빠르면 5분이면 충분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관람을 시작하니 5분으로는 충분치가 않았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기록이 가진 무게감이 새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대중미디어의 기록을 모아 개요적인 안내를 덧붙였을 뿐인데, 그런 객관적이고 메마른 활자와 사진과 영상 속에서 차별과 혐오의 가해와 고통과 투쟁의 피해가 진하게 묻어나왔다고 말한다면 너무 극적인 표현일까요?

자연스럽게 기획자와 나눈 대화를 통해 이 전시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제람’은 영국에서조차 성소수자 이슈를 공권력이 다룰 때와 당사자가 다룰 때의 차이가 극명하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애초에 아카이빙 자체가 존재하지 않지요. 그런 이유로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획자들에게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추측컨대 그 과정은, 소수자가 당해왔던 차별과 혐오와 폭력의 기록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고통과, 전시 전과 후에 예상되는 기록의 현재화라는 고통이 중첩되어 뒤섞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이 아카이빙을 하는 과정은 이전에 당했던 차별과 혐오를 다시 떠올려 현재화하는 데서 오는 고통과, 전시회가 알려지고 사람들이 찾았을 때의 반응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아는 데서 오는 고통이 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람은 이 전시회의 의도가 ‘평범한 사람들’, 소수자가 시달린 차별과 혐오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최대한 그들에게 ‘어려움 없는’ 수준으로 준비했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이 전시회에 왔을 때 보일 반응에 대한 두려움도 토로했습니다. 또한 이런 작업을 개인의 의지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작업할 엄두조차 내지 않는 사회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전했습니다.

모두가 김두한과 구마적의 대결에 몰려가 있을 때, 한 구석에서 구타당한 바로 그 사람이 그 인파가 흩어질 때 잠시라도 눈을 둘 수 있도록 최대한 가볍고 부드럽게 다듬어 내놓은 것이 이 전시회인 겁니다. 국가도 경찰도 손을 놓고 있을 때 피해자가 자신의 손으로 그 저주스런 흉기들을 그러모아 이것들을 이렇게 모으면 이러한 의미가 된다고 말하기 위해 진열 방법을 고민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외면한 이 뒷골목의 역사들은 또 우리 사회에 얼마나 더 많이 있을까요?

기획자들은 이러한 사회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고, 전시회는 프로젝트의 시작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온라인 사이트에 더 많은 아카이빙 자료로 접근하도록 해놓았고, 프로젝트를 좀 더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길벗체’라는 서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전시장 곳곳을 물들인 색채들은 바로 이 서체에서 비롯된 색깔들이었습니다. 향후 이 서체에서 차별과 혐오의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할 예정이라고도 전했습니다.

십자가를 흉기로 휘두른 폭력의 기록

이 전시회가 대상으로 한 관객인 ‘평범한 사람들’ 속에는 한국의 기독교인도 포함됩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성소수자 혐오의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중에는 혐오를 ‘진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둔갑시켜 적극적으로 차별과 혐오와 폭력과 배제를 조장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침묵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차별과 혐오가 부끄러운 일임을 인정하기라도 하듯, 한동대와 장신대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한 기록은 따로 마련된 작은 공간 속에 있었습니다. 벽면에 사건 개요가 시간대별로 전시되어 있고, 그와 관련하여 벌어진 혐오적인 설교가 공간 끄트머리에서 음성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도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교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지만, 여전히 미약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성소수자들은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이 드러날까 불안에 떨며, 성경의 몇 가지 구절로 자신을 정죄하는 교회를 애증하며 힘겨운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뒷골목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기세등등하게 대낮의 넓은 거리에서 흉기를 휘두르는 ‘혐오하는 기독교인 세력’을 막아서고 폭력을 끝내는 역할은 ‘대다수의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 있음을, 그 작은 공간 속에서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침묵이야말로 차별과 혐오를 일상적으로 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자 지지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코리안 모먼트

문득 일상의 순간에서 차별과 혐오의 태도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려 보았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는 알든 모르든 존재하는 공기처럼 누군가를 무시하고 심지어 존재를 부정하는 흉기들이 숨어있기 때문이죠. 휘두르는 사람은 그러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를 입고 심지어 죽임당하기까지 합니다.

이 전시는 바로 그 흉기들을 모아 보여주며 그 뒤에 숨은 차별과 혐오, 상처와 죽음을 드러내는 첫 번째 과정입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과 힘이 쏟아부어졌는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짐작조차 어렵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이 전시장으로 옮기는 발걸음에도 큰 용기가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내 손에 들린 흉기를 알아차리고, 자신이 가해자임을 알며, 길을 걷는 저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뱉는 말 속에 칼날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되는 순간은 분명 고통스럽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모먼트이기 때문입니다.

용기 있는 걸음에는 용기 있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최고의 찬사이며 지지일 것입니다. 함께 걷지는 못할지라도, 그 걸음을 막아서는 장애물을 걷어내는 데 연대하는 것만으로도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앞으로도 이어질 이 프로젝트의 끝에 맞이할 풍경이, 태극기와 성조기 대신 차별과 혐오 철폐의 무지개색 깃발이 휘날리는 새로운 코리안 모먼트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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