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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오데이 2020년 2월호
그리스도의 성찬으로
작은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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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지음 토마 기자 소속 성공회 길찾는교회
작성일 2020.02.05 10:00 조회 1,31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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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상황에선 이렇게 언급하는 게 조금 낯설지만 아브라함으로 부터 비롯된 믿음의 역사적 맥락을 따라가보면, 유대교와 이슬람교 드루즈교 바하이 신앙 등은 히브리 신앙의 유산을 나눠 받은 형제 종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형제 종교들과 기독교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그리스도를 신앙하느냐 아니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 신앙이란 그리스도라는 필터로 성서를 바라보는 신앙’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시점에서도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느냐, 역사적 맥락이나 신학 전통의 변천을 감안하느냐 같은 것들이 여러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다양한 과정과 이런 차이들이 지금의 기독교의 다양한 분리와 관계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형제 종교들, 가톨릭과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의 여러 종파들은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다채롭고 서로 다른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 신학적 관점들은 때로 반목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는데, 그런 관점들을 모두 조망하거나 거칠게 아우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한다.

2천여 년 정도 지난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시작점 자체는 현대 사회와는 정서도 윤리도 다른 시대로부터 시작된 신앙이기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을 말하고 살아낸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또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성장해온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금은 우리가 이어나가면서 새롭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감회를 느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신앙과 신학을 다양한 각도에서 말하고 있는 신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그녀의 책 『축의 시대』에서 ‘남이 자신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인류 역사 속의 황금률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또는 서로 다른 종교에 속해 있더라도 지지할 수 있을 만한 포괄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 신앙의 유산을 함께 공유하는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받은 중요한 신앙의 유산에는 세례와 성찬이 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식별하기 위해 이 세례와 성찬은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특히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척당하고 쫓겨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안에서 평화와 평등을 만들어가기 위해 아주 간절한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상황이 역전되어 그리스도교가 지배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되면서 피해자였던 그리스도인이 이제는 반대로 가해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종교가 권력이 되고 전쟁을 통해 평화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 얻은 정의롭지 않은 평화를 권력을 통해 강요하기도 한다. 비단 그리스도교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기술된 역사의 면면들을 조금만 살펴봐도 이 폭력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 맥락을 통해 이 폭력들을 성찰해본다면, 이 폭력의 역사에 대해 반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스도의 유일한 물리적 폭력의 순간은 종교 권력을 통해 성전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던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지, 율법을 어긴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죄인들의 길벗이었으며 먹보와 술꾼으로 지탄받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가 그 시대의 소수자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함께 걸었었는지를 반추해본다면, 지금 우리가 신앙을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도 조망할 수 있다. 창녀라 손가락질받던 여인들과 더럽다 여겨져 배척당하던 이주민들, 쫓겨난 사람들, 몸과 마음이 상했다는 이유로 배제되던 사람들에게 예수가 취했던 태도 속에서 드러난 예수의 가치관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쉴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어제의 성서를 바라보고 오늘의 일상을 성찰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리스도를 닮는 삶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회칠한 무덤 같은 종교에 머무느냐가 나누어진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회 중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란 곳이 있다. 이 교회 사람들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스타의 사망 소식이 이슈가 되면 그에 편승하여 장례식에 찾아가 고인은 ‘지옥’에 갔다고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심지어는 총기난사 사고가 일어난 현장으로 가서는 ‘하느님이 죄인을 벌하기 위해서 범인을 보내신 것이다’라고 떠들어댄다. 비슷한 교회가 한국 개신교에도 존재하는데, 사실 개신교 주요 교단에 속한 교회들 다수는 그와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성 소수자나 이웃 종교, 형제 종교들을 악마화하고 증오하는 발언을 통해 자신의 거룩함을 증명하려는 이들의 태도에서 나는 어떠한 종교성도 찾을 수 없다. 타인에 대한 혐오가 그 종교를 단단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삶은 혐오를 통해 거룩을 세운 적이 없다.

몇몇 개신교 교단을 경험하면서 내 신앙의 주요 관심사는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이었다. 어떤 교단에 속하건 서로 다른 신학적 맥락을 가졌건 상관없이 함께 말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면 나는 성찬, 즉 그리스도의 식탁에 그 진실의 한 면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강요하지 않은 환대의 자리’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카렌 암스트롱의 황금률과도 상통한다. 또한 내가 속한 성공회 전통 안에서는 역사적 맥락과 전통, 그리고 동시대의 지성 모두를 중요한 관점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신앙의 변천 과정에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성공회 기도서의 성찬 기도문 중에서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라는 표현을 사랑한다. 처음 이 기도문으로 성찬을 나누었을 때, 내 신앙의 여정을 안아주며 마음을 꿰뚫는 듯한 감정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

이 고백은 현대 사회의 기준마저 포괄하며 아우르는 중요한 선언이다. 고대 사회에서 출발한 이 신앙이 어떻게 오늘의 가치관을 담아낼 뿐만 아니라 반석처럼 든든하게 영원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이 담겨 있다.

나는 이 기도 한 소절로 노래를 만들었고, 다양한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불러왔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성서와 전통, 그리고 현실이 서로 반목하지 않고 그리스도 신앙이라는 포괄적인 영성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을 누렸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품이 차별 없이 평등하고 넉넉하기 때문이리라. 


그리스도의 성찬으로 우리를 부르셨네

어떠한 차별 없이 누구나 오라 하네

이 빵은 주님의 몸 이 잔은 주의 보혈

주님의 식탁으로 우릴 하나로 부르셨네

우린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루네

우린 모두 다르나 주님의 보혈로 이 생명 누리네


부디 그리스도 신앙의 옷을 입고 혐오를 통해 거룩을 말하려는 시도가 멈춰지길, 그래서 그리스도의 더 넓은 품에 함께 안겨 한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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