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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복음을 이야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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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도현 기자 소속 뉴스앤조이
작성일 2020.03.25 10:29 조회 92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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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교회 주변으로 무리 지어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손에는 전도지를 들고서 지나가는 어린이들에게 사탕이나 풍선을 함께 나눠주곤 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교회에 나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마트 주차장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잘 걸리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지요. 사영리를 들고 만나기도 했고요. 그러고 보면 저도 상당한 열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명령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도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명령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신앙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지요. 그런데 전도라는 것이 실상 안 믿는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 함께 나가자’는 말이 곧 대명령을 따르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교회 나가자고 하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요즘 분위기는 또 다른 것 같습니다. 뭔가 쿨하지 않은 것을 요청하는 것 같고, 괜히 심기를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하죠. 어떤 이는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가자는 말이 더 이상 전도로서 효용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선 교회 나가자는 권고가 과연 예수님의 대명령을 따르는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그랬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좋은 소식, 복음

복음은 예수님의 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처음으로 시작하신 것은 다름 아닌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복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정작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이야기하신 복음은 대체 무엇일까요?

마태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후, 세례자 요한이 정치 권력에 의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고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서는 갈릴리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공생애 기간에 전하신 복음을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전한 복음,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누가’는 조금 더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후 예수님의 일성은 4장 18절~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의 관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곧 희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생각하셨던 창조 질서, 사회 질서의 회복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입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공관복음 모두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복음은 곧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 포로, 장애인,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희소식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설계를 읽어보면 당연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천

사실 특별히 별난 이해도 아닙니다. 기존 교회도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교회의 구조적 특성상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적극적인 실천을 하기가 어려운 점이 분명 있습니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s은 그러한 기존 교회의 어려운 점들을 보완하면서 조금 더 자유롭게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실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기존 교회는 비신자를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을 전도의 일차적 목표로 삼지만 새로운 교회는 지역사회나 이웃의 필요를 먼저 듣고 그들의 삶 속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습니다. 그들의 삶 가운데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영적 필요를 발견하고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이 기존의 표현, 즉 기존 교회를 허물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존 교회가 신앙을 이어가는 데 훨씬 좋은 환경일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는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필요한 형태입니다. 기존 교회와 새로운 교회가 서로 협력 보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일궈가야 합니다.

새로운 교회는 기존 교회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기 때문에 조금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파이어니어, 즉 개척자라고 부릅니다. 파이어니어는 교회 주변에서 교회와 세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교회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교회 밖에서 비신자와 커뮤니티를 형성합니다. 이들을 통해 교회는 세상과 복음을 소통할 수 있습니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적응하기

교회의 새로운 표현은 어쩌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교회가 적응해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우리는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은 모든 억압과 결박을 풀어내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창조 질서의 회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이야기하고 실천함으로 이뤄집니다. 기존 교회와 새로운 교회가 협력함으로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복음을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기관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사실 새로운 교회라고 하지만 교회 역사를 보면 익숙합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교회는 항상 그 시대에 맞게 새로운 형태를 취해왔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랬고 종교 개혁이 그랬습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당시 조선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교회를 세웠지요. 이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교회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 이후 이어온 공교회성을 유지하면서 복음을 세상에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은 그 길을 제시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운동이 우리 한국 교회에도 새로운 변혁의 바람을 일으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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