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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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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사은 기자 소속 성공회 분당교회
작성일 2020.03.25 10:30 조회 1,03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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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 정도의 생명체도 아닌 바이러스(COVID-19) 때문에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바이러스 집단 감염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동네 아이들도 다 아는지경이지요. 특정 종교집단의 집단감염사태를 날마다 듣고 개학이 연기되어 겨울방학이 연장되는 호사까지 누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회사에서도 회식을 금지하고 각종 모임을 피하라 하고 가족 여행마저 말리면서 웬만하면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장합니다.

심지어 ‘전례 중단’ 사태까지 불러왔습니다. 이 글을 쓰는 3월 초에 성공회는 교우들이 모이는 전례와 사목활동을 2차례 연속 중지하여 3월 22일까지 거의 한 달간을 모이지 않게 될 예정입니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추가 연장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듭니다.

이 중단은 ‘잠정적인 예배 중단’, ‘잠정적인 거리 두기’입니다. 일본 강점기나 6.25 전쟁 때와 같이 3자의 강압에 따른 일도 아니고 쓰나미, 지진, 기후 위기 앞에서의 불가항력적인 상황도 아닙니다. 고작 약 30나노 미터(약 10억 분의 1m) 크기의 (인간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덩치에 놀라운 능력의 뇌를 가진 21세기 호모 사피엔스는 이성적으로 이 일을 인지하고 원인을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2월 25일 주교님의 사목 지침이 나오기 일주일 전부터 우리 가족은 자발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스스로 윤리적 판단에 따라 내린 ‘공동선’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누가 오라 가라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의 허락이 필요한 것도 눈치를 볼 일도 아닙니다. 우리 가족은 성공회 교인이니까요.

일상이었던 주일 예배를 막상 몇 주째 빠지다 보니 예배를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나는 왜 예배를 생각하고 있나? 혹시 나는 지금 예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인가? 영성체 순서가 누락된 가정(또는 개인) 예배는 앙꼬 없는 찐빵인가? 우리는 초대교회 때처럼 날마다 음식을 나누고 있지 않은가? 아니지 가족끼리만 하는 애찬을 어떻게 초대교회와 비교한단 말인가?’ 뭐 이런 질문 말이지요.

글을 쓰는 시점에 경기도 내 56퍼센트에 달하는 교회가 여전히 집합 예배를 강행할 예정이라 하여 지방 자치 단체에서는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 명령’을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집단감염의 예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는 중단될 수 없다는 일부 종교인들의 결기에 찬 기고들도 보았으니 이 긴장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을 기억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아마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겠습니다. 예배를 금지하는 '악한 세력과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극보수 진영에서 흔히 써먹는 레퍼토리이죠. 기사들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공동 예배가 이렇게까지 화두가 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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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것’이라는 고정 관념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항상 제 입에서는 예배드린다는 말만 나왔었지요. 하느님을 높이는 예배로서의 뜻을 강조하는 ‘드린다’는 표현이 예배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예배를 ‘본다’는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인데 이 표현을 쓰는 것에 참 인색했습니다.

‘구경하다’, ‘즐기다’는 뜻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탓에 놓치게 되는 ‘예배 보다’의 좋은 우리 말뜻을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통해 대하면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주일날 교인들이 교회 가는데 왜 가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이 ‘예배 보러 간다’고 합니다. 예배 보러 간다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다’는 말은 그냥 ‘구경한다’는 말과 아주 다릅니다. 보통 우리는 잔칫집에 갈 때도 ‘잔치 보러 간다’, 그리고 초상집에 갈 때는 ‘상주 보러 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다’는 말은 구경한다는 말이 아닌 ‘참여한다’, "보살핀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잔칫집에 그냥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는 일손을 거들어주고 도와주면서 함께 축하하고 기뻐해 주는 일입니다. 초상집 보러 가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상주를 위로하고 궂은일을 보살피고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와주자는 뜻이 담긴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가는 것도 바로 이런 뜻으로 한 주일 동안 헤어졌던 교인들을 만나보고 그동안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어려웠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정을 나누고 서로 도와주는 것인거지요.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은 이렇게 잔치 보러 가는 것이나 초상집 보러 가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고’ 예배를 ‘보는’ 관계성 안에서 나를 ‘형성’하는 것이 또한 예배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교우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예배는 근원적으로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잘 몰랐고 잊고 있었습니다. 예배 안의 한 주체로서의 나를 인식하지 못했던 탓이기도 합니다. 비단 이것이 개인 인식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한 예로 예배의 전체 구성에서 특정한 순서가 시간의 절반을 차지한다면 주인공은 그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자이겠지요. 나머지는 모두 비중 낮은 조연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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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에 따른 의무감으로 꽉 짜인 순서에 따라 찬송 부르고, 설교 듣고, 헌금 내는 예배가 아니라 몸을 움직여 예전적 실천을 해내는 예배는 관계 이전에 나를 위한 것입니다. 예배 참여자로 하여금 예전적 실천을 하도록 구성된 예배, 이렇게 나를 ‘형성’하는 예배는 다시 공동체의 ‘관계성’을 조직하며 공명합니다.

이 관계성 가운데 ‘드리는’ 예배 역시 이루어질 수 있으며 하느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리라 믿습니다.

한 편,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고 엮어 시리즈를 만들어내듯이 한 번 또 한 번의 감사성찬례를 엮어 교회와 교구, 대한성공회를 형성해 왔는데 마치 시간을 역행하듯이 이제 모이지 않음을 실천하는 것으로 ‘공동선’을 행하는 대한성공회를 봅니다. 이 큰 결정으로 사회와 공명하는 성공회를 발견하고 그 일원인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성육신의 실천은 COVID-19를 이겨내고자 몸부림치는 사회를 위해 '예배드리지 않음’으로도 실천할 수 있음을 봅니다.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예배의 한가운데에 함께여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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