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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노래
주여,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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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지음 토마 기자 소속 길찾는교회
작성일 2020.03.25 11:32 조회 1,21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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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팬데믹 선언을 했다. 팬데믹 선언은 전염성 질병이 범지구적으로 심각하게 퍼질 때, 경보 단계를 최고 위험등급으로 올리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상황과 비교하면 한국의 경우는 확진자에 비해 사망자가 적은 편이고 방역망 구축에 행정력을 일찍 집중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래도 약국에 줄을 서서 마스크를 구입하는 모습이나 휴관 중인 도서관 등의 공공시설,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아이들이나 출근 대신 재택으로 일을 처리하는 직장인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풍경을 보면 상황의 심각성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러나 코로나19에 부족하나마 효과가 있다고 하는 면마스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고, 식료품과 생필품 사재기도 아직까진 그렇게 심각해보이진 않는다. 주민번호에 따라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는 마스크 5부제 같은 경우도 다른 국가에 비하면 형편이 좋은 것이라고 하니 범국가적인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정부의 행정력이 이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도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안전망의 구멍은 언제나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만 크게 뚫려 있다.

재난은 약자를 먼저 습격한다

서울역 앞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나, 준비되고 있던 자활 사업들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빈곤계층도 빈곤계층이지만, 미등록 이주민 노동자들은 마스크를 구입할 수 있는걸까? 모든 재난은 약한 사람을 먼저 습격한다. 약한 사람도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여야 모두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이다. 만약 어떤 이유로건 상대적인 약자가 이러한 안전망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리고 약하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것이 당연해진다면, 배제되는 약자의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질 것이다.

아주 오래 전, 한국의 기독교음악이 다양한 방향으로 성장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생소하지만 CCM 인디밴드도 여럿 등장했었다. 그 중에 앨범도 내지 않고 활동을 멈춘 밴드가 하나 있었는데 그들의 노래 중 한 곡은 이런 가사로 만들어져 있었다.

 

기독교인들끼리 친하고

기독교인들끼리 결혼하고

기독교인들끼리 직업을 가지고

세상은 어두워졌다 말하네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세상이 어두워진 건지 우리가 빛을 가린 것인지

- 불조심 밴드 ‘당신을 일조권 침해죄로 고발합니다’

 

개신교 일각에서 고지론을 부각시키고 점점 더 많은 크리스천 기업들과 크리스천 전문 결혼 정보회사가 만들어질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곡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곡의 가사를 곱씹게 된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일상의 빛과 소금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과연 빛과 소금으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종교적 은혜가 종교의 밖으로 순환되지 않고 내부에서만 머물 때, 종교는 일종의 지적 유희나 허영이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만 서로 즐거워하고 우리끼리만 좋은 문화를 생산해내는 것은 어쩌면 그리스도 신앙이 요청하는 빛과 소금의 자리와는 거리가 먼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끼리만의 문화는 익숙하고 안전하며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게토화되고 우리 바깥과의 소통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일이 계속된다면, 사회적 소통을 끊고 자신들만의 천국을 누리는 것으로 안주한다면, 그릇된 선민 의식으로 거짓을 일삼으며 똘똘 뭉치는 사이비 집단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일상의 고통에 함께 신음하고 더 취약한 이들을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야말로 연약하지만 강한 그리스도 신앙의 특질이자 본성이 아닐까?

연약하기에 강하다

침묵의 사순절기를 보내면서 계속해서 부활의 생명력을 묵상하게 된다. 죽음을 거치지 않은 부활은 없다. 코로나19로 서로 단절된 이 상황 속에서 떨고 의심하고 도망치는 우리의 모습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연약한 믿음을 연상케 한다. 함께 위대한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 기대했던 구세주는 힘없이 체포되었고, 그것을 막으려던 나의 저항마저 무위로 돌아갔다. 나의 마음은 패배감과 열등감, 냉소로 가득 찼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와 그의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이 비겁한 침묵을 깬 것은 내가 아니었다. 랍비였던 니고데모도, 부자 청년도 아니었다. 부활의 날을 향해 용기를 냈던 것은 남성 권력의 시대에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도 계수조차 되지 않는 열등한 존재로 밀려나던 여성들이었다.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조차 없던 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은 생명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리고 그 놀라움과 기쁨의 생명력을 독점하지 않는다. 의심과 절망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무력해진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그대로 전달한다. 생명을 만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행동으로 말해준다.

우리는 연약하다. 그리고 연약함은 우리의 가치인지도 모른다. 주님 안에서의 연약함은 스스로 취득하는 강한 힘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강한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뚫고 나오는 부활의 생명력은 강한 자의 빼앗음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이기지 못할 작은 빛처럼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 겨울이 이기지 못할 봄처럼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 그 자체인 것이다. 약함은 어쩌면 우리의 자랑일는지도 모른다.

 

주여,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삶이 어둡고 피곤에 지친 모든 이들과 더불어

-주여,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의심과 절망으로 가득찬 모든 이들과 더불어

-주여,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두려움과 괴로움에 휩싸인 모든 이들과 더불어

-주여,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병들고 약해진 모든 이들과 더불어

-주여,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죽음에 이른 이들과 쇠잔한 모든 이들과 더불어

-주여,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켈틱 매일기도 중, 주일_부활의 날 ‘세상과 이웃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2014년 사순절기 즈음에 켈틱매일기도로 묵상을 하다가 주일_부활의 날 기도문 중에서 저녁: 맡기는 기도 중 세상과 이웃을 위한 기도를 노래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여,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라는 대구보다 그 앞에 놓인 상황들, 삶이 어둡고 피곤에 지친, 의심과 절망으로 가득 찬, 두려움과 괴로움에 휩싸인, 병들고 약해진, 죽음에 이르고 쇠잔한, 이 표현들이 당시의 내 상황, 내 주위 사람들의 상황, 밀려나고 배제된 사람들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몇 해가 지났지만 그 상황들은 그다지 나아지진 않았다. 다만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부활을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신앙을 삶을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그 이전보다 좀 더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부활의 능력, 죽음마저 이기는 생명의 힘은 밀려난 사람들이 먼저 찾아내어 독점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계급이나 성별, 재산의 유무, 신체조건이나 나이, 출신 지역이나 국가, 사상이나 정치성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그 생명에도 차별이 없다. 그리고 차별이 없는 사랑은 약자가 약자에게 연대하고 생명을 나누는 행동에서 실현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선택해야 할 삶의 자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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