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오데이 2021년 봄호
코로나, 옛 것을 되새기다
페이지 정보
본문
사스보다 전염성이 크고, 독감보다는 치명적이다. 잠시 스치고 가 려나 했는데, 꽤 오래 곁에 머무른다. 독감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려 니 만만치 않다. 그렇게 손님과 보낸 세월이 해를 넘겼다. 비말(飛沫) 을 통해 전염된다하여 마스크를 하고, 사람을 멀리 한다. 이렇게 비 대면 생활이 시작된다.
대면과 비대면
사람은 만나서 얘기하고 정보를 나누고, 필요한 것을 나누는 등, 생산적인 행동을 한다. 비대면 수업, 비대면 근무, 비대면 상거래는 의사소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 서 나온 말이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사회적 거리는 사람과 사 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제한하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몇 명이 모일 수 있는 지를 정한다. 늘 하던 습관이 있고, 늘 가던 곳이 있는 데, 하루 아침에 가지마라 한다고 쉬 발길을 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간염 초기에 사망자가 발생하고 주위에 하나 둘 생기는 감염자를 보 게 되자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다. 걱정하였던 커피숍이나 노래방 보다 종교단체의 저항이 컸다. 특히 기독교 기반의 종교가 그렇다.
왜 그럴까? 어릴 적 고향에서는 장로교를 다녔다. 특히 대구 경북 지역이라 보수적이었고, 주일날에는 안식일이라 물건도 사지 말아 야 한다고 배웠다. 주일은 성스럽게 지켜야 했다. 성스럽게 지킨다 는 건 매주 교회를 나와야 한다는 말이고, 얼굴을 내밀어 설교를 듣 고, 밥을 같이 먹으며, 성경 공부를 같이 해야 한다. 비록 시험기간 이라도 주일은 쉬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대면활동이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간 교회는 정말 모든 것을 제쳐두고 갈만 한 곳이었다. 각 종 문화생활은 물론 인생상담 그리고 개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기도와 그 성취에 대한 기대가 넘쳐났다. 예수 믿고 구원 받 아 갈 하늘 나라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이 들어 성공회로 교회를 옮겼다. 예배생활은 성공회의 예전으 로 대체되었다. 예전이라는 간접적인 형식은 안정감을 주지만 잠시 머무는 곳이란 점에서는 같다. 물론 개신교는 임시거처에 눌러 앉 힐 기세다. 앞서 말한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늘나라 가기’는 기복 적일 수 있다. 왠지 하늘나라 가려면 좀 잘해야 할 것 같고, 기왕 할 바에 교회에서 선행을 하고, 기부행위를 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 다. 교회는 하늘나라 공식지점이기 때문이다. 살 부비고 사는 이를 챙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이게 바로 대면활동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하지만 신앙은 비대면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으며,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출애 33:20)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 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이사 6:5)
우리가 아는 그 분은 스스로 숨어계시는 분(Deus absconditus)이 다.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보다는 신부님이, 목사님이 편 하다. 눈에 보이는 가족이 친구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 어렵지만 성 경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 다(마르 3:35)”라고 했다. 마음 속에 누구나 편한 곳이 있기 마련이 지만 신앙은 편한 것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우리는 늘 보고 싶은 대 로 보고, 바라는 걸 바라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신앙은 익숙한 것을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낯설고 불편하고 힘든 여정이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 거라” (창세 12:1)
신앙의 요소가 사회적 거리두기라면 공동체는 어떻게 봐야 할까? 어디까지를 공동체로 인정할 수 있을까? 또한 무엇을 위한 공동체인가? 우선 공동체는 지역적이고 혈연적인 성격을 너머 목표를 공유한 다.같은교회를다닌다거나 같은교구에있다는건그저같은장소 에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공동체는 정체성을 공유해야 한다. 정체 성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 로 자신을 끊임 없이 규정하는 행위이며 의식이다. 이러한 정체성은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라고 고백하는 예배를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교회는 예배를 위해 모인 공동체이다. 코로나 이후 교회는 어떠해 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근본으로 돌아가자’이다. 모여서 좋은 말 듣 는다고 예배가 아니다. 말귀를 알아 듣는 일이 예배다. 말귀가 열리 는 데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좋은 귀를 가졌거나, 좋은 스승을 두었 을 때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라는 걸 보면 좋은 귀가 낫 다. 사실 정말 몰라서 못 알아듣는 건 드물다. 관심이 없어서다. 어 제 있던 달이 오늘 새로워 보이는 건 달이 새로운 게 아니라 달을 보 는 자신이 새로워진 게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뜻을 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 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 겠느냐? (미가 6:8)
여지것,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좁게 받아들였다. 정의가 무엇인 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뭔지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하느님 이 원하는 일은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우리의 바람이 하 느님의 바람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일을 시키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하느님이 일하신다 (Missio Dei)는 말이다. 하느님은 상식과 이성 안에서도 일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미가는 야훼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않냐고 되 묻 는다.
그저 사는 것도 어렵다. 그저 어렵다. 힘든 일을 피하면 좋지만 피 할 수 없는 일을 애써 피하는 것 또한 곤욕이다. 차라리 그 노력이면 당당히 맞서는 게 낫다. 그렇게 사는 것도 힘든데 정의롭게 사는 건 어떨까? 정의는 나름의 무게를 견뎌내야 비로소 드러난다. 결국 정 의롭게 산다는 건 부끄럽지 않게 제 몫의 짐을 지는 것이다.
새치기하지 않는 것이고, 남에게 미루지 않고, 오롯이 제 몫으로 여기는 게다. 자기 몫의 짐을 질 수 있는 건 마음이 온유하고, 남 탓 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 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 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 이다. 내멍에는편하고내짐은가볍다.” (마태 11:28~30)
그리고 겸손하고 온유하려면 빈 것에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화려한 볼거리나 들을 거리가 아니라 빈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마 도 한국 교회는 빈 마음(kenosis)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