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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오데이 2021년 봄호
Binding The Strong Man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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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니베이커(영국 성공회 교회 선교회 CMS) 번역:김경문 기자 소속
작성일 2021.04.07 22:34 조회 873회 댓글 0건

본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휘장은 사제들에게만 허락된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 었다. 그렇기에 휘장이 찢어진 이 사건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방법 을 통제해온 종교 제도 권력의 종말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길이 열 렸다. 그리스도의 비폭력 저항은 종교 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들을 신비로운 방식으로 해체했다.

뉴질랜드에 머무는 동안 체드 마이어스의 <Binding the Strong Man>을 읽었다. 이 책은 마르코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정말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는 사람들을 억눌러 온 권력에 대항했던 예수의 비폭력 저항을그려냈다. Hendricks는 이 책의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이 책은 교회의 본래 모습을 회복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책을 좀 더 빨리 읽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예수가 맞선 권력은 두 가지, 로마 제국의 권력과 예루살렘의 종 교 권력이었다. 체드 마이어스는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이야 기에서 이 두 가지 권력을 읽어낸다. 첫 번째, 회당에서 일어난 이야 기에서 악령은 예수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하고 묻는다. 이 질문에는 예수께서 당시의 제도화된 종교권력과 충돌하는 모습을 기록한 마르코 복음서의 관점이 녹아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 율을 깨시고, 사람들을 치유하셨으며, 하느님께서 당시 제도 종교가 불결하다 여기던 사람들에게 찾아 오신다고 전했다. 예수께서 만나 신 이들은 눈 먼 거지, 이방인, 부정하다 여겨지는 이들, 상종 못할 세리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경 계를 흩어버리셨다. 이후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조사하기 위해 제도 권력을 대표하는 이들이 찾아왔으나, 예수께서는 이들 앞에서도 제 도 종교의 억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바리사이파의 누룩을 조심 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강력한 경고이다. 이 모 든 것들은 예루살렘 성전정화 사건에서 정점을 이룬다. 예루살렘 성 전은 제도 종교와 착취 구조의 심장부였다. 제자들은 이 건물의 위용에 감탄했지만, 예수께서는 이것이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다. 마이어스의 말처럼 예수께서는 성전 중심의 세계관과 힘의 통치가 무너지는 새 로운 시대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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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nding the Strong Man (Paperback / 20th Ed.) A Political Reading of Mark's Story of Jesus Myers, Ched, Hendricks, Obery M., Jr.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께서 호수를 건너 ‘군대’ 귀신에게 사로잡 힌 사람을 만난 이야기이다. 마이어스는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삶을 옭아매는 로마제국의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야한다고 말한 다. 예수는 그를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리고 예수는 이 힘에 의해 죽임당했다. 힘 있는 자들이 예수를 어느 정도의 위협으 로 인식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이 글을 쓰는)오늘은 제국과 종교 권 력의 합작품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이다. 나는 그 리스도의 죽음이 제국보다는 종교 권력의 분노로 인해 비롯된 것이 라 생각한다. 예수께서 그들의 세상을 위협하셨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은 ‘길을 예비하라’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예수의 삶 은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길을 보여준다. 이 길은 놀랍다. 이 길은 또 한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를 좋아함에도 제도 교회로부터 배제되는지 알고 있는가? 나는 나만의 투박한 방식 으로 그를 따르고싶다. 그 방식은 비폭력의 삶,활동가의 삶, 지배 권 력에 대항하는 삶이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뉴질랜드에 머물면서 식민주의와 이 권력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 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고, 지금은 교회 안에서, 특별히 내가 평생을 몸담고 있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종교 권력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앞선 글에서 나는 우리에게, 특별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함께 모이는 일을 온라인에서 더욱 창의적인 방법으로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상상과 통제의 완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지금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시기이며 실제로 다양한 작업과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봉쇄지침은 교회 안에서조차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 의 길로부터 멀어져있는지 알게 해주었다. 특히 이번주에 나를 화나 게 한 것은 성찬을 나누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셨고, 사람 들은 지금도 가정과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고 있 다. 예수께서 식탁을 나누신 곳은 항상 문제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잘못된 사람들이라 여겨졌던 이들을 자신의 식탁에 초대하셨다.

코로나 19의 급격한 확산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감사성찬례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집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교들과 사제들 뿐이다. 다른 이들은 그저 이것을 보는 것만이 가 능하는 말이다! 부활절과 같은 모두가 영성체를 하도록 권장되는 날에는 주교들과 사제들이 집에서 감사성찬례를 드리고, 다른 이들은 심영성체(영적 영성체)를 통해 성찬례에 참여하도록 되어있다.

심영성체는 빵과 포도주를 나눌 수 없는 장소에 있는 상황에서 하 는 것이다. 나는 예배를 인도하는 이들이 신자들에게 심영성체를 하 도록 안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심영성체가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눌 수 없는 지금의 이 상황을 성찰하는데 사용되길 바란 다. 가이드라인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성찬례를 드리지 않는 것도 좋 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오직 사제들만이 감사성찬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이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읽었는 지 확인하기 위해 두 번이나 다시 보았다. 이 지침은 감사성찬례를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만든다. 당연히 해야하고, 모두가 하기를 희 망하고, 나 역시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자신의 집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다. 교회가 이것을 바람직한 실천 이라 말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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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의 예배에 대한 사목자의 재량권에 대한 조항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규정도 없는 상황이라 면,적합한 예배 양식을 만들어 다른 사목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이다. 사목자들이 어떤식으로든 행동해주길 바란다.

성찬례를 할 때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누가 집전을 할 수 있는 지, 어디서 해야 하는지와 같은 많은 규정들이 있다. 그레이스 공동 체는 우리가 수 년간 사용해온 기도문을 승인 받기 위해 노력해왔 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성모마리아 교회에서 서 품 받은 성직자가 예배를 집전하는 것을 존중해왔다. 성찬례 규정에 는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는데, 교회 건물처럼 축성된 곳이 아닌 장 소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 리는 허가 받지 못한 장소인 집에서 모일 때는 식사의 일부로서 비 공식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빵과 와인을 나누기로 했으며, 서품 받 은 성직자가 이를 집전하지 않도록 정했다. 나도 이 방식이 제정신 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역시나 예상대로 주교들은 사제들이 자신의 집에서 온라인으로 성찬례를 드릴 수 있도록 허가했다. 잉글랜드 성 공회는 창의성에 가치를 두며, 예배의 형태와 진정성 모두가 중요하 기에 말 뿐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극도로 통제되고 묶여있다.

교회는 성사 신학 및 영리하게 고안된 다른 방법들을 동원해 이 에 대한 정당성을 세운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통제를 위함이다. 교 회는 오랜시간 통제 구조를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를 만들 어버린 교회는 적어도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났거나, 혹은 그 길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가 하는 말에서 그리스도께 서 하신 일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는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 이다. 바리사이파의 누룩을 조심해야한다. 이는 마치 찢어졌던 성전 의 휘장이 다시 꿰매어진 것과 같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중심 그룹 은 사제의 마술적 행위가 있어야만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 를 기억하는 일이 가능한시나리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제하는 사 제 계급이 존재해야 하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버렸다. 참으로 어처구 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 지배 권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동조하지 않을것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 도의 죽음은 이미 이런 권력을 무력화시켰다. 나는 그리스도의 이 야기를 기억하고, 그레이스 공동체의 다른 이들과 함께 온라인으로, 그리고 집에서는 제니와 함께 기쁘게 빵과 포도주를 나눌 것이다. 이것이 잉글랜드 성공회의 공식적인 감사성찬례가 될 수 없다는 것 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찬을 나눌 것이다. 더 많은 가정, 그 리고 많은 관할사제들이 교회의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기를 희망한 다. “선교하는 교회”, “평신도 사목자를 키우는 교회”, “하느님의 백 성을 해방시키는 교회”라는 수사만이 가득한 잉글랜드 성공회는 이 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몇 해전, 다른 이유로 잉글랜드 성공회의 교권과 부딪혔을 때, 나 는 접근 금지 테이프로 테이블을 둘러싸고, 빨간 테이프로 성서를 묶고, 성직칼라에 빨간 테이프를 붙인 ‘Red Tape’라는 작품을 설치 했다. 오늘다시금 그 때를 떠올리게 된다.

가정에서 성찬을 나눠온 나의 경험에 비춰보면, 식사 중간이나 마 지막에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 가장 간단하게 성찬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때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기억하고 그의 이 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모인 이들이 함께 대화할 수 있 도록 초대하고 복음서의 이야기, 예를 들어 예수께서 식탁을 베푸 신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교회가 사 용하는 예문은 온라인에서 볼 수 있고, 아이오나 공동체나 그레이 스 공동체의 기도문을 사용하거나 즉흥적으로 할 수도 있다. 즉흥적 으로 기도한다면 이런 류의 기도문 형식을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레이스 공동체의 부활밤 예식에서 우리는 성 힐다 공동체 와 자넷몰리가 쓴 아름다운 기도문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나누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성찬을 나누는 일, 그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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